상고사와 고구려 유적 기행
- 조회
- 111
- 등록일
- 2024-10-13
상고사와 고구려 유적을 만날 수 있는 곳
중국 랴오닝성(요녕성)은 우리의 상고사와 고구려 유적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특히 심양의 요녕성박물관에서는 요하문명의 유물을 만날수 있고, 환인과 집안 등지에서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건축 유적으로 산성과 다양한 무덤 양식을 볼 수 있다.
기행지도
주요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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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녕성박물관
중국 요녕성의 중심도시 심양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인 요하문명 시기의 무덤과 집터에서 나온 유물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특히 우하량 유적지의 신전에서 발견된 여신상과 곰 모양의 발 조각상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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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성
고구려가 수,당과 맞서 싸우기 위해 요동 지역에 쌓았던 천리장성을 구성하고 있는 성이다. 가장 중심인 요동성을 지원하기 위한 부속성으로 기능을 했는데, 옆에 흐르는 태자하를 방어선으로 이용해 쌓은 석성이다. 특히 동북 3성 지역의 고구려 산성 중에서 보존 상태가 좋고 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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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본산성
고구려의 첫 수도였고 주몽이 처음으로 도읍을 삼았던 ‘졸본성’이라 불렸던 곳. 환인 시내의 북쪽 오녀산 정상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2천년 전에 쌓았던 석성이 남아있다. 자연 지세를 이용한 산 정상에 만들었기에 방어에 취약한 일부 구간에만 쌓았고 특히 서문과 동문의 옹성구조, 개이빨식 축성법은 고구려의 성쌓기 수법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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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였던 집안의 평지 도성. 고구려는 이곳에서 북쪽의 우산과 동쪽의 용산을 두고, 서로는 통구하, 남으로는 압록강을 자연 지세로 삼아 궁궐과 도성을 쌓았다. 유리왕(서기 3년) 때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장수왕(서기 427년) 때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25년간 수도로 기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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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산성
국내성 북쪽 통구하 상류에 위치한 환도산성은 국내성과 함께 하나의 방어체계를 이루고 있는데 전시에는 궁궐을 비우고 산성에 들어가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천혜의 요새지만 고구려 당시 위나라와 연나라의 침략으로 두번 함락되기도 했다. 국내성이 함락되었을 때는 임시 수도로 기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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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하 고분군
산성 입구에는 고구려 고분군 중 위용과 규모를 자랑하는 산성하고분군이 있다. 고구려 무덤 양식 초기에는 돌을 무더기로 쌓은 적석총 형태부터 서서히 네모난 기단을 1단, 2단 등으로 올리고 그 속에 돌을 채우는 방단계제식 무덤이 등장한다. 시대에 따른 고구려 무덤 양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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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동대혈
국동대혈은 나라의 동쪽에 있는 큰 동굴이란 뜻으로, 나라란 수도를 뜻한다. 집안에서 압록강을 따라 17km정도 올라가면 산 중턱에 앞뒤가 트여있는 석회암 동굴 지형이 있는데, 이 곳에서 매년 10월 고구려 왕은 군신들을 거느리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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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이런 고구려의 무덤 양식을 방단계제식석실묘라고 한다. 돌을 쌓는 적석총을 더 높이 쌓기 위해 네모난 기단을 만들고 그 속에 돌을 채워서 올리는 방식인데 총 7단이며 22개 층으로 돌을 나란히 쌓았다. 5단 높이에 석실이 있어 시신을 안치했고 무너지지 않도록 각 면에 3개씩 12개의 호석을 쌓았다. 현지에서는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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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백두산에서 화산재가 쌓인 응회암 덩어리를 집안까지 가져와서 왕릉 앞 비석으로 세웠다. 높이는 6.4m이고 4면에 1,775자 글자를 새겼다. 주요 내용은 광개토대왕의 정복의 업적과 당시 주변국과의 관계를 적고 있는데 200여자가 판독이 어려워, 일제 시대의 임나일본부설 주장에 따른 비문 조작 문제가 여전히 논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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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
방단계제식석실묘의 형태로 만들었고, 한 변의 길이는 66m이다. 무덤 주위는 4면에 5개씩 총 20개의 호석이 둘레를 에워싸고 있다. 네모난 단 안에는 단단한 강돌 외에도 산돌이 섞여 있어서 부식이 빨리 진행되었고, 그 결과 무덤이 무너져 내린 모습을 하고 있다. 무덤 주위에서 광개토대왕릉이 산처럼 안정적이고 바위처럼 견고하라는 기원을 담은 기와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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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분 5호묘
병사의 투구처럼 생긴 무덤이 5개가 나란히 있어서 통틀어 5회분이라고 하고, 그 중 5번째 무덤을 5호묘라고 한다. 지상에 있던 무덤칸을 지하로 묻고 흙으로 덮어서 마무리하였다. 무덤칸 안은 돌로 된 석실 네 벽과 천장까지 고구려 사람들의 풍속, 사신도와 하늘의 별자리 등을 그려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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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표
서쪽의 큰 무덤이란 뜻으로 집안에서 통구하를 건너 서쪽으로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면 평원 끝에 자리하고 있다. 무덤은 가운데를 파서 돌들이 흘러내려 마치 2개의 무덤이 붙어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연나라 모용황이 쳐들어와 능을 파헤치고 시신을 탈취해갔던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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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묘
무덤가에서 ‘천추만세영고’라는 기와가 발견되어 천추묘라고 부르고 있다. 국내성에서 통구하 건너 서쪽편 마선 지역의 압록강 가에 광개토대왕릉보다 더 큰 규모의 무덤이 있는데 현지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였던 고국양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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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
중국 요녕성 요양시에 있는 수,당과 맞서 싸운 고구려 성으로 수나라의 100만 대군도 막아냈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당시 성벽의 높이는 30m 이상이었다고 추정되며, 성벽을 지켜냈던 해자는 지금도 도심 속 수로가 되어 그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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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녕성박물관
중국 요녕성의 중심도시 심양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인 요하문명 시기의 무덤과 집터에서 나온 유물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특히 우하량 유적지의 신전에서 발견된 여신상과 곰 모양의 발 조각상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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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성
고구려가 수,당과 맞서 싸우기 위해 요동 지역에 쌓았던 천리장성을 구성하고 있는 성이다. 가장 중심인 요동성을 지원하기 위한 부속성으로 기능을 했는데, 옆에 흐르는 태자하를 방어선으로 이용해 쌓은 석성이다. 특히 동북 3성 지역의 고구려 산성 중에서 보존 상태가 좋고 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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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본산성
고구려의 첫 수도였고 주몽이 처음으로 도읍을 삼았던 ‘졸본성’이라 불렸던 곳. 환인 시내의 북쪽 오녀산 정상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2천년 전에 쌓았던 석성이 남아있다. 자연 지세를 이용한 산 정상에 만들었기에 방어에 취약한 일부 구간에만 쌓았고 특히 서문과 동문의 옹성구조, 개이빨식 축성법은 고구려의 성쌓기 수법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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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였던 집안의 평지 도성. 고구려는 이곳에서 북쪽의 우산과 동쪽의 용산을 두고, 서로는 통구하, 남으로는 압록강을 자연 지세로 삼아 궁궐과 도성을 쌓았다. 유리왕(서기 3년) 때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장수왕(서기 427년) 때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25년간 수도로 기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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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산성
국내성 북쪽 통구하 상류에 위치한 환도산성은 국내성과 함께 하나의 방어체계를 이루고 있는데 전시에는 궁궐을 비우고 산성에 들어가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천혜의 요새지만 고구려 당시 위나라와 연나라의 침략으로 두번 함락되기도 했다. 국내성이 함락되었을 때는 임시 수도로 기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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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하 고분군
산성 입구에는 고구려 고분군 중 위용과 규모를 자랑하는 산성하고분군이 있다. 고구려 무덤 양식 초기에는 돌을 무더기로 쌓은 적석총 형태부터 서서히 네모난 기단을 1단, 2단 등으로 올리고 그 속에 돌을 채우는 방단계제식 무덤이 등장한다. 시대에 따른 고구려 무덤 양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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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동대혈
국동대혈은 나라의 동쪽에 있는 큰 동굴이란 뜻으로, 나라란 수도를 뜻한다. 집안에서 압록강을 따라 17km정도 올라가면 산 중턱에 앞뒤가 트여있는 석회암 동굴 지형이 있는데, 이 곳에서 매년 10월 고구려 왕은 군신들을 거느리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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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이런 고구려의 무덤 양식을 방단계제식석실묘라고 한다. 돌을 쌓는 적석총을 더 높이 쌓기 위해 네모난 기단을 만들고 그 속에 돌을 채워서 올리는 방식인데 총 7단이며 22개 층으로 돌을 나란히 쌓았다. 5단 높이에 석실이 있어 시신을 안치했고 무너지지 않도록 각 면에 3개씩 12개의 호석을 쌓았다. 현지에서는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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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백두산에서 화산재가 쌓인 응회암 덩어리를 집안까지 가져와서 왕릉 앞 비석으로 세웠다. 높이는 6.4m이고 4면에 1,775자 글자를 새겼다. 주요 내용은 광개토대왕의 정복의 업적과 당시 주변국과의 관계를 적고 있는데 200여자가 판독이 어려워, 일제 시대의 임나일본부설 주장에 따른 비문 조작 문제가 여전히 논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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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
방단계제식석실묘의 형태로 만들었고, 한 변의 길이는 66m이다. 무덤 주위는 4면에 5개씩 총 20개의 호석이 둘레를 에워싸고 있다. 네모난 단 안에는 단단한 강돌 외에도 산돌이 섞여 있어서 부식이 빨리 진행되었고, 그 결과 무덤이 무너져 내린 모습을 하고 있다. 무덤 주위에서 광개토대왕릉이 산처럼 안정적이고 바위처럼 견고하라는 기원을 담은 기와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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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분 5호묘
병사의 투구처럼 생긴 무덤이 5개가 나란히 있어서 통틀어 5회분이라고 하고, 그 중 5번째 무덤을 5호묘라고 한다. 지상에 있던 무덤칸을 지하로 묻고 흙으로 덮어서 마무리하였다. 무덤칸 안은 돌로 된 석실 네 벽과 천장까지 고구려 사람들의 풍속, 사신도와 하늘의 별자리 등을 그려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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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표
서쪽의 큰 무덤이란 뜻으로 집안에서 통구하를 건너 서쪽으로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면 평원 끝에 자리하고 있다. 무덤은 가운데를 파서 돌들이 흘러내려 마치 2개의 무덤이 붙어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연나라 모용황이 쳐들어와 능을 파헤치고 시신을 탈취해갔던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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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묘
무덤가에서 ‘천추만세영고’라는 기와가 발견되어 천추묘라고 부르고 있다. 국내성에서 통구하 건너 서쪽편 마선 지역의 압록강 가에 광개토대왕릉보다 더 큰 규모의 무덤이 있는데 현지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였던 고국양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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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
중국 요녕성 요양시에 있는 수,당과 맞서 싸운 고구려 성으로 수나라의 100만 대군도 막아냈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당시 성벽의 높이는 30m 이상이었다고 추정되며, 성벽을 지켜냈던 해자는 지금도 도심 속 수로가 되어 그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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