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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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4-09-30
단군 시대부터 구한말까지 전 역사가 녹아있는 역사의 현장
우리 민족의 상고사인 단군 시대부터 구한말 개화시기까지의 전 역사가 녹아있는 역사의 현장. 1천년이 넘게 고려 개성과 조선 서울을 지키는 관문 역할을 하면서 모든 외세의 침입을 가장 먼저 막아내던 곳. 역사 • 평화 • 생태 • 안보 기행을 함께 할 수 있는 체험 학습 현장
기행지도
추천 코스
1) 기본코스 : 강화평화전망대 ~ 강화 역사박물관 ~ 강화고인돌 ~ 광성보 ~ 전등사
2) 국난 극복 코스 : 고려천도공원 ~ 연미정 ~ 강화전쟁박물관 ~ 선원사지 ~ 광성보
3) 병자호란 코스 : 강화전쟁박물관(갑곶돈대) ~ 강화읍성 남문 ~ 연미정
4) 병인양요 코스: 김포 문수산성 ~ 김포 덕포진 ~ 정족산성 ~ 고려궁지
5) 신미양요 코스: 강화역사박물관 ~ 강화전쟁박물관 ~ 광성보 ~ 덕진진 ~ 초지진
연미정 ~ 강화전쟁박물관 ~ 강화외성 ~ 광성보 ~ 초지진 ~ 분오리둔대 ~ 계룡돈대
7)고려 사적 코스: 고려천도공원 ~ 강화역사박물관 ~ 강화읍성 서문 ~ 고려궁지 ~ 강화읍성 남문 ~ 강화외성
주요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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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평화 전망대
강화도 최북단 양사면 제적봉에 있는 전망대면서, 휴전선 248km 구간에 있는 북한 전망대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해 있다. 조강 건너편으로 개성시와 예성강, 황해도의 연백벌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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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조선시대 충청, 경기, 황해의 삼도수군 지휘부인 삼도수군통어영을 두었던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서울 인근이면서 바다로 둘러쌓여 있어서 연산군, 광해군 등 왕족의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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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역사박물관
강화도 전체의 역사와 유적지를 모형과 사진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전시하고 있다. 강화도의 역사를 배우기 위해 가장 먼저 들러야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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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고인돌
강화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고인돌로 탁자식 , 또는 북방식 고인돌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청동기 시대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수가 우리나라에 있으며 그 중 강화도, 고창, 화순 고인돌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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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전쟁박물관
강화도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의 역사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빼앗겼던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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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돈대
예로부터 김포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길목 역할을 하던 곳이며, 병인양요 때에도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 제독이 6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상륙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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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강화해협의 요충지인 손돌목을 사이로 건너편 김포의 덕포진과 마주하고 있다. 또한 신미양요 때 어재연, 어재순 형제와 350여명의 조선 수군이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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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목돈대
염하 구간 중 가장 물살이 쎄고 뱃사공 손돌의 이름이 남아있는 손돌목을 내려다보며 지키는 요새. 신미양요 당시 열악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돌과 주먹으로 백병전을 벌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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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돈대
손돌목 쪽으로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위에 만든 돈대이며 강화 제1경으로 꼽힌다. 돈대 앞 여울을 손돌목이라 부르며, 건너편 김포의 덕포진엔 뱃사공 손돌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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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강화도 외곽을 지키는 5진 7보 중 가장 아랫쪽에 위치하고 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신미양요 당시 미군과, 일본의 운요호와도 교전하였고, 초지진 옆 소나무에는 신미양요 때 포탄을 맞은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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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
김포의 덕포진과 함께 해협을 지키며 15문의 포가 남아있는 강화도 제1의 포대이다. 신미양요 때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에 의해 연이어 함락되었던 격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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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외성
강화도는 강화산성, 또는 강화읍성이라 불리는 내성과 내성을 둘러싼 외곽의 강화중성, 그리고 동쪽의 강화해협으로부터 상륙하는 적을 막기 위한 강화외성까지 3중성으로 방어했다. 강화외성은 적북돈대부터 초지돈대까지 염하를 따라 23km 구간을 벽돌로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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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사지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했고, 선원사에서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대장도감을 설치, 팔만대장경을 조성하였다. 그 후 대장경 목판은 조선 초에 육로를 통해 합천 해인사로 옮겨져서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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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정족산에 위치한 사찰로 고구려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 추녀에는 목수가 사랑했지만 돈을 들고 도망간 여인이 평생 죄를 뉘우치며 살라고 만든 나녀상이 유명하다. 절 뒷편은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 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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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족산성 안에는 천년 고찰 전등사와 함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가 있었으며, 병인양요 때 양헌수를 비롯한 조선 군대가 매복해 있다가 프랑스 군을 물리친 승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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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사고지
정족산성 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창고. 임진왜란 중에 서울과 충주, 성주의 사고가 불타버렸고, 전주의 실록 복사본을 보다 깊은 산속으로 옮기면서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과 함께 강화도에 사고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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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오리돈대
강화도의 54개 돈대 중 가장 남쪽 중앙에 위치한 돈대. 바다로 돌출된 자연 벼랑위에 만들어져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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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돈대
강화도 서쪽 갯벌을 간척해 만든 망월평야를 지키는 돈대. 1679년 경상도 군위현의 어영군이 축조했다는 명문이 남아있어 강화도 54개 돈대 중 유일하게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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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곶돈대(연미정)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 염하의 북쪽 입구를 지키는 돈대이며 연미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연미정에서 인조임금은 후금과 형제 관계의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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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
고려가 몽골과 대항하기 위해 1232년 개성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후 39년간 사용한 궁궐터이다. 항몽 기간 고려는 강화읍성과 중성, 외성까지 3중성으로 궁궐을 방어하도록 성곽을 건설하였다. 현재 강화읍성 내 고려궁지에는 조선시대 외규장각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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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읍성 남문
강화읍성의 남문은 안파루라고 한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종묘와 왕실의 비빈들은 강화도로 대피하였고, 함께 뒤따라 온 김상용은 청군의 강화읍성 침략에 맞서 안파루에 폭약을 쌓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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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읍성 서문(연무당)
강화읍성의 서문은 첨화루이며 옆에는 군사들을 훈련시키던 연무당 건물 터가 남아있다. 1876년 운요호를 끌고 온 일본의 무력 앞에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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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평화 전망대
강화도 최북단 양사면 제적봉에 있는 전망대면서, 휴전선 248km 구간에 있는 북한 전망대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해 있다. 조강 건너편으로 개성시와 예성강, 황해도의 연백벌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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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조선시대 충청, 경기, 황해의 삼도수군 지휘부인 삼도수군통어영을 두었던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서울 인근이면서 바다로 둘러쌓여 있어서 연산군, 광해군 등 왕족의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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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역사박물관
강화도 전체의 역사와 유적지를 모형과 사진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전시하고 있다. 강화도의 역사를 배우기 위해 가장 먼저 들러야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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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고인돌
강화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고인돌로 탁자식 , 또는 북방식 고인돌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청동기 시대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수가 우리나라에 있으며 그 중 강화도, 고창, 화순 고인돌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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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전쟁박물관
강화도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의 역사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빼앗겼던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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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돈대
예로부터 김포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길목 역할을 하던 곳이며, 병인양요 때에도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 제독이 6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상륙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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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강화해협의 요충지인 손돌목을 사이로 건너편 김포의 덕포진과 마주하고 있다. 또한 신미양요 때 어재연, 어재순 형제와 350여명의 조선 수군이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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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목돈대
염하 구간 중 가장 물살이 쎄고 뱃사공 손돌의 이름이 남아있는 손돌목을 내려다보며 지키는 요새. 신미양요 당시 열악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돌과 주먹으로 백병전을 벌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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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돈대
손돌목 쪽으로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위에 만든 돈대이며 강화 제1경으로 꼽힌다. 돈대 앞 여울을 손돌목이라 부르며, 건너편 김포의 덕포진엔 뱃사공 손돌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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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강화도 외곽을 지키는 5진 7보 중 가장 아랫쪽에 위치하고 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신미양요 당시 미군과, 일본의 운요호와도 교전하였고, 초지진 옆 소나무에는 신미양요 때 포탄을 맞은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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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
김포의 덕포진과 함께 해협을 지키며 15문의 포가 남아있는 강화도 제1의 포대이다. 신미양요 때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에 의해 연이어 함락되었던 격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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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외성
강화도는 강화산성, 또는 강화읍성이라 불리는 내성과 내성을 둘러싼 외곽의 강화중성, 그리고 동쪽의 강화해협으로부터 상륙하는 적을 막기 위한 강화외성까지 3중성으로 방어했다. 강화외성은 적북돈대부터 초지돈대까지 염하를 따라 23km 구간을 벽돌로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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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사지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했고, 선원사에서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대장도감을 설치, 팔만대장경을 조성하였다. 그 후 대장경 목판은 조선 초에 육로를 통해 합천 해인사로 옮겨져서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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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정족산에 위치한 사찰로 고구려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 추녀에는 목수가 사랑했지만 돈을 들고 도망간 여인이 평생 죄를 뉘우치며 살라고 만든 나녀상이 유명하다. 절 뒷편은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 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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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족산성 안에는 천년 고찰 전등사와 함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가 있었으며, 병인양요 때 양헌수를 비롯한 조선 군대가 매복해 있다가 프랑스 군을 물리친 승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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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사고지
정족산성 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창고. 임진왜란 중에 서울과 충주, 성주의 사고가 불타버렸고, 전주의 실록 복사본을 보다 깊은 산속으로 옮기면서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과 함께 강화도에 사고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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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오리돈대
강화도의 54개 돈대 중 가장 남쪽 중앙에 위치한 돈대. 바다로 돌출된 자연 벼랑위에 만들어져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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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돈대
강화도 서쪽 갯벌을 간척해 만든 망월평야를 지키는 돈대. 1679년 경상도 군위현의 어영군이 축조했다는 명문이 남아있어 강화도 54개 돈대 중 유일하게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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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곶돈대(연미정)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 염하의 북쪽 입구를 지키는 돈대이며 연미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연미정에서 인조임금은 후금과 형제 관계의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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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
고려가 몽골과 대항하기 위해 1232년 개성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후 39년간 사용한 궁궐터이다. 항몽 기간 고려는 강화읍성과 중성, 외성까지 3중성으로 궁궐을 방어하도록 성곽을 건설하였다. 현재 강화읍성 내 고려궁지에는 조선시대 외규장각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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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읍성 남문
강화읍성의 남문은 안파루라고 한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종묘와 왕실의 비빈들은 강화도로 대피하였고, 함께 뒤따라 온 김상용은 청군의 강화읍성 침략에 맞서 안파루에 폭약을 쌓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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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읍성 서문(연무당)
강화읍성의 서문은 첨화루이며 옆에는 군사들을 훈련시키던 연무당 건물 터가 남아있다. 1876년 운요호를 끌고 온 일본의 무력 앞에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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