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토론회
독립운동가 백용성 잊혀진 백년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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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19-02-27
독립운동가 백용성 잊혀진 백년의 진실
기록이 말하지 못하는 암울한 시대일제와 밀정들의 눈을 피해모든 활동을 비밀리에 숨겨야 했던 독립운동가 용성스님생존을 위해 모든 자료를 불살라야 했던 후원자와 후손들“강대국의 종속국이 되지 말고,주인다운 주인국이 되어라”대한독립과 새로운 백년을 꿈꾼용성스님의 담대한 비전을 만날 수 있습니다.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입니다.잊혀진 100년의 진실 너머용성스님의 독립운동 행적을 찾아가는뜻깊은 토론회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개요
- 일시 :
- 2019년 2월 27일(수) 오후 2:00-5:00
- 장소 :
-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
- 주최 :
-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 주관 :
- 사단법인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 후원 :
-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발표 요약
■ 기억이 기록이다
일본의 탄압과 잔악함이 점점 극에 달해가던 때 조국을 위해 목숨 던지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수많은 유명 무명의 독립운동가들. 비밀유지가 생명이던 항일독립운동에서 기록은 곧 죽음이 되는 시절이었다. 이념대립과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후손들은 침묵해야만 했다. 남은 기록이나 자료는 불살라졌다.
■ 김구 / 상해임시정부
백범 김구는 해방 후 귀국하여 1945년 12월 12일 임시정부 요인 30여명과 함께 서울 종로 대각사를 방문해 용성스님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성 조사가 항일정신과 불교중흥을 위한 노력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용성조사는 이미 열반하셔서 안타깝지만, 스님의 크고 깊은 뜻을 우리 동지들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성스님이 쌀가마니에 돈을 넣어 만주로 보내주어 긴요하게 썼던 것을 말하며 용성스님을 회상했다.
-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 1권
■ 3.1 독립운동 : 막후 조율
1918년 손병희 교주와 독립운동 거사 논의, 용성스님은 손병희에게 민족대표 숫자 33인으로 제안 (천도교 11인, 기독교 11인, 불교 11인)
‘사바세계 차사천하 남섬부주인 인간세계 4주를 지배하고 있는 도리천 33천 제석천왕 환인천주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것이 (3.1운동의)대의입니다.’
1919년 2월, 서울에서 용성스님, 한용운, 오세창 3인 비밀회동
조국의 장래와 현재의 긴박성 및 만세운동 거사를 논의. 함께 동석한 환경스님에게
‘만약을 대비하여 옥중 사식을 담당하고 이후의 수습과 지하운동을 하라’
[ 종교간의 통합을 위한 손병희 교주와의 문답 ]
용성스님 : 천도교에서 독립운동에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손 교주께서 불교계 대표를 포용하셨습니다. 그러니 기독교계를 포용해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병희 선생 : 천도교는 서학인 기독교를 배격하는 동학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는데 힘이 부족하면 그 힘을 빌리기 위해서 수용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기독교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천도교 단독의 힘으로 독립운동이 가능합니다.
용성스님 : 본래 남과 북이 없는 것인데, 어느 곳에 동과 서가 있겠습니까. 하늘은 하나의 하늘일 뿐, 동쪽 하늘이 따로 있고 서쪽 하늘이 따로 있겠습니까. 불교계가 참여하지 않고, 천도교 자체로도 독립운동의 여력이 남아돌아가지 않겠습니까마는 손 교주께서 불교계를 포용하듯이 기독교계를 포용해서 2천만 동포를 다 안아 우리나라 최고의 민족대표가 되시어 역사에 길이 남는 천도교 교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민족대표 33인 구성 조정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
기독교 장로회 측과 기독교 감리회 측에서 각각 11인씩 민족대표로 하여 달라는 강력한 요청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용성 진종 조사께서 대답하시기를 ‘독립운동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될 수가 없고 오직 도리천인 33천 하느님의 보우하심에 의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하겠음으로 그리할 수는 없다’라고 잘라 말하였던 것이다. '반드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기원해야 하므로, 불교계에서 한용운과 백용성 2명만 들어가고,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으로 조정해서 민족대표 33인을 구성하자.'
■ 3.1 독립운동 선언서에 공약삼장 추가
[공약삼장]
1.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 인도와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1.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
1.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며,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 용성스님과 한용운스님 관계
1919년 독립선언문 발표
민족 대표가 모여 있다고 일본헌병대에 신고하고, 체포당함
민족대표가 붙잡혀갔다는 소식이 서울 종로 중심으로 전국 주요도시에 확산
3.1만세운동의 불길이 온 나라에 퍼져나감.
■ 태극기 사용의 배경
1919년 3월 1일 사용할 깃발에 대해 ‘반도기’, ‘대한독립기’, ‘태극기’를 놓고 논란이 있었음.
용성스님은
“반도기도 좋지만은 우리 민족은 신라 가야 백제 고구려의 후손인데 반도기로 해 버린다면 발해의 옛 땅, 고구려의 옛 땅을 포기하는 선언임과 동시에 삼천리 반도강산의 대한제국의 영역만으로 한정되어 버린다면 장차 어찌 되겠단 말인가? 그러니 대한 반도기 대신에 태극기 물결을 일으켜 이 사바세계 남섬부주 5대양 6대주에 진리의 조국이 한반도임을 알리는 계기로 삼자"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 대한민국 국호 사용의 배경
1905년 을사조약
1906년 용성스님은 고종에게 해인사 고려대장경 경판 보수 불사 요청
고종, 고려대장경 경판 보수 불사금으로 2만 냥을 전하고 ‘강대련’ 파견
용성스님 경판 불사 발원기도문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어지이다’
1912년 이후 6년간, 전국 360고을의 관직을 지낸 이나, 그 후손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막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당시 평민의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것을 보고 대한제국의 회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3.1운동을 대한민국 수립운동으로 제안
‘기미년 3.1독립운동 맨 처음은 대한제국 부흥운동으로 시작한 것을 용성 진종 조사의 가르침에 의하여 만해 한용운 대사로 하여금 민족대표 등과 독립운동 주도자 등에게 대한민국 수립운동으로 전개하여야 한다고 향도한 것이 독립운동의 핵심이 된 것이다.’
3.1운동 중에 독립을 하면 누가 임금이 되느냐는 질문들이 백성들 사이에서 있었고, 임금 없는 나라를 세운다는 답변이 민중사회에 확산되고 있었다. - 한국독립운동사 총설
⇒ 용성스님의 ‘대한민국 수립운동’ 은 1919년 4월 11일 설립된 상해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국호 지정에 영향을 미쳤다.
■ 독립운동 자금 지원 : 상해인삼무역
1907년 임동수와 중국방문, 중국 명찰 고승과 교류
1908년~ 1919년 임동수 중국의 씨족 네트워크와 결합, 인삼 무역 사업 본점 상해 설립 및 인삼 무역 거점 마련(13년간)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기반 마련에 큰 역할
미국 거주 이승만에게도 자금 지원,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기반
■ 독립운동 자금 지원 : 함경남도 북청 금광
1913년~1916년 전 북청군수 강홍도의 제안에 따라 금광 운영
만주와 연해주 일대 독립군들에게 자금 지원
금광은 막대한 독립자금을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한 묘책
‘한꺼번에 큰 돈을 움직이면 일제의 의심을 살 것이므로, 북청에 금광을 운영하기 위해 투자자금을 움직이는 것처럼 위장하자.’
-임동수
북청 금광 대리인 백상규(용성스님 속명) 해임 취지 신고(조선총독부 관보)
■ 독립운동 자금 지원 : 화과원 만주 명월촌, 봉녕촌 / 경남 함양
[ 1923년 만주 연길 명월촌, 봉녕촌 선농당 화과원]
“호국 호법(護國護法)의 발원으로써 중국 만주 간도성 연길현 명월촌과 봉녕촌에 각각 700정보(210만평) 가량의 농장을 마련하였다. 식민통치의 압박에서 살지 못하고 유랑하는 동포를 맞이하여 이곳에 생활의 기초를 세워주고 불교 포교를 시작하여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래 주면서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는데 주안점을 두게 된 것이다.”
[ 1927년 함양 화과원 ]
“이 화과원에서 수행하는 수도승의 안목은 생사일여(生死一如) 이기 때문에 전국 불교계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일단 함양 화과원으로 모아서 이곳에서 뱃길로 산길로 하여 일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일부는 만주 독립운동가에게 전달한 광복운동을 위한 자금이 모아지는 근거지가 된 것이다.”
■ 홍범도 장군과의 만남
“환단고기를 만주 연길 대각교당에서 재발간할 때 홍범도가 지원했는데, 그 자금을 임동수로부터 받았다. 전해 내려오던 환단고기를 임동수의 손자 임철호(도문스님의 아버지)가 6.25 발발 이후 9월 9일 다른 예언서들과 함께 불태웠다.”
“용성스님이 삼보귀의 오계를 수여하고 범명을 ‘대염’ 으로 하였다. ‘대염여래불’이 불꽃과 불빛과 같은 대광명으로 중생을 교화하신 것처럼, 홍범도 장군은 대한민국 전 국민의 불꽃과 불빛과 같은 대광명으로써 조국광복의 대염 대장군이 되라”
■ 윤봉길 의사와의 만남
윤봉길이 서울 천도교 고당에 자주 왕래하던 중 한용운을 만나고, 한용운을 통해 용성스님과 인연이 됨.
용성스님이 1930년 윤봉길에게 수계를 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에게 파견, 이 과정에서 임동수가 지원
“서울 종로 대각사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와 철생 임철호 애국지사가 용성 진종 조사로부터 삼귀의 오계와 용성조사 세간오계를 받아 가졌다. 이때 재현 원주스님은 외호에 힘을 기울이고 태현 시자스님은 인례의 소임을 정성껏 하였다. 매헌 윤봉길 의사에게는 살신성인의 길로 인도하였고 철생 임철호 애국지사에게는 아들을 낳아서 불타 조사의 혜명을 이을 것을 당부하였다. 매헌 윤봉길 의사의 위국충성에 가득찬 입지를 관찰하고 중국 만주 용정 대각사 포교당을 거쳐 다른 길로 돌아서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 선생님께 보내어 백범 김구 선생님의 지도하에 상해 홍구공원에서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이고 만대 위국절사로 되게 하는 막후 기둥이 되시었다.”
■ 1만 대한의사군
1938년 조선총독부의 무지비한 탄압으로 대각교가 강제 해산 당하자 용성스님의 활동은 사실상 봉쇄되었다. 이로 인해 스님은 독립운동 방법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용성스님을 모시고 철생 임철호 애국지사를 통역인으로 대동하여 중국을 방문하나 국공합작 이후이기 때문에 중구 국부군 장제스 총통과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주석을 각각 따로 만나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중략) 대한독립과 중국의 일본군 국외추방이 큰 과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다행히 중국은 이미 국공합작이 되어 일본군 섬멸에 나섰으니 이에 협조의 진언을 잘 들어 보라’하시면서
‘한 사람의 대한의 대장부 매헌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고 또 중국의 전 국민이 살신성인의 위대한 애국자라고 칭송하고 있다. 대한의 남아인 매헌 윤봉길의사의 쾌거는 장차 조국에 광복이 오리라는 희망의 등대다.’
‘나 용성진종은 매헌 윤봉길의사와 같은 대한의사군을 1만명을 선정하여 중국으로 보낼 터이니, 국부군에서 10만군인, 공산군에서 10만군인 합하여 21만 대군이 마치 시멘트가 적당량의 모래와 물을 만나서 벽돌이 되게 되면 그 벽돌로 집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시멘트와 같은 대한의 대장부 윤봉길 의사와 같은 대한의사군을 국부군으로 보낼 것인가, 공산군으로 보낼 것인가’
이에 의논한 결과 대한의 대장부 매헌 윤봉길 의사와 같은 대한의사군 1만명을 먼저 공산군으로 보내어 공산군과 합동훈련을 시킨 뒤, 다시 11만의 공산군, 대한의사군과 10만 국부군과 연합 훈련을 마친 뒤에 일본군을 섬멸할 것을 용성진종 조사와 장학량 대장군과 국부군 장개석 총통과 공산군 모택동 주석과 합의를 하되, 대한의사군 1만 명이 먼저 중국에 오는 것이 급선무라 조속히 서둘러 달라는 합의를 보고, 시자 동헌완규조사는 은사 겸 법사이신 용성진종 조사를 모시고 귀국하였던 것이다.”
용성스님이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만났을 때, 도문스님의 아버지인 임철호가 통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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