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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ace Foundation 평화재단

2014 용성조사 탄생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

시대의 큰스승 아, 용성조사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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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
등록일
2014-05-29

시대의 큰스승 아, 용성조사시여!

용성조사님 탄신 150주년을 맞이하여 용성조사님의 삶을 현재에 비추어 재조명함으로써 조사님께서 불교계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끼치신 영향과 업적을 기리고,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 아울러 오늘날 우리 불교계가 나아가야할 바른 길과 우리 민족의 시대적 과제를 모색하고 실천하는 계기로 삼는다.

개요

일시 :
2014년 5월 29일(목) 오후 2시~5시 30분
장소 :
한국불교문화역사관(240석)

프로그램

14:20
축사
이이화 (역사학자, 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14:25
사회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14:35
발표 1
부처님 정법의 계승과 전파
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
14:35
발표 2
시대의 과제, 독립운동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15:25
휴식
-
15:25
토론1
서재영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15:40
토론2
김경집(진각대학원 교수)
15:40
토론3
한동민 (수원박물관 학예팀장)
15:40
토론4
조민(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16:20
질의응답 및 전체 토론
-
16:50
닫는말씀
법륜스님
2014 용성조사 탄생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

토론 요약
올해 용성진종조사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식과 함께 계획된 행사는 심포지엄이었다. 용성조사의 삶과 업적에 대한 학술적 연구와 조명이 아쉬운 현실에서 심포지엄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5월 29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진행된 심포지엄은 두 가지 지점에서 용성조사를 조명하였다. 하나는 ‘부처님 정법의 계승과 전파’라는 측면이요, 또 하나는 ‘시대의 과제, 독립운동’이라는 점이었다. 두 명의 발표자와 각 주제에 대해 두 명씩의 토론자가 나왔다.
이날 행사장은 매우 놀라운 광경을 연출했는데, 찾아온 대중이 너무 많아 심포지엄으로는 대단히 드물게도 객석 사이의 계단과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들어앉았다. 좌석은 총 242석이었는데 그보다 100 명 이상이 더 온 것으로 어림되었다. 이 점은 진행과 발표를 맡은 연구자들에게도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사회자와 발표자가 입을 모아 이토록 대중이 많이 온 경우는 처음이며, 또한 이렇게 높은 집중도를 보이는 경우도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심포지엄은 법륜스님의 여는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법륜스님은 용성조사께서 불교의 지성화, 대중화, 생활화에 선구가 되신 점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점을 주목하며, 오늘날 우리들은 그러한 선조들의 인연공덕으로 풍요와 성장을 누리고 있는 만큼 그 정신을 계승하여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미래 백년의 희망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날은 특별히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이신 자승스님께서 격려사를 해주었는데 용성스님께서 어려웠던 시기에 청정계율과 수행선풍을 잡아주시는 등 길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불교계는 본연의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을 것이라며 그간 연구가 미흡한 것에 안타까움이 많았는데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것은 종단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치하하였다. 축사를 해준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3.1혁명은 운동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의 민주주의 헌법정신을 잉태한 혁명으로 평가돼야 하며 그럴 때 용성스님에 대한 재평가작업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발표에 앞서 사회를 맡은 고려대 철학과 조성택 교수의 인사가 있었다. 그는 있어야 할 것은 부재하고 도래해야 할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궁핍의 시대에 선각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질문을 던지며, 선각자란 있지 않은 길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며 용성스님이 바로 그런 선각자였다고 서두를 열었다.
첫 번째는 경희대 철학과 허우성 교수의 발표였다. ‘부처님 정법의 계승과 전파’를 주제로 준비한 그의 발표문 제목은 ‘자아완성과 구세는 둘이 아니다: 용성의 대각사상’ 이었다. 그는 “불교 수행의 목표는 종종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표현되는데 상구보리란 자아완성의 욕구요, 하화중생은 구세의 욕구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서 이 두가지 욕구를 가장 조화롭게 실천한 분이 용성”이라고 했다. “출가 이후 용성의 삶은 두 개의 시기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출가 후 거의 30년간 지속된 자기인식적•개인적 깨달음의 시기이고, 다음은 사회적•역사적 깨달음에서 비롯된 대중교화기, 곧 하화중생기이다. 당시 사회에 대한 용성의 문제의식은 대각교운동으로 나타났다.” 한편, “용성의 삶과 사상을 한국 근현대불교사에서 자리매김하는 방법은 그를 만해, 성철과 비교해보는 일이다. 용성은 만해와 함께 독립선언에 참가했지만 만해보다는 여러 가지 점에서 전통적이었고, 성철은 용성을 칭송했지만 여러 면에서 그를 극복하려했다. 자비와 사회적 깨달음에서 우러나는 용성의 구세욕구는 자아완성의 욕구만큼이나 치열하여 그에게 자아완성과 구세는 둘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행사를 주관한 정토회에 대해 “정토회는 나름대로 용성을 잘 이해하고 있고, 개인의 깨달음과 사회 실천에 있어서도 충실한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허우성 교수의 발표에 대해 불광연구원 서재영 연구원의 논평이 있었다. 그는 용성의 현대적 계승을 말하는 데 있어 불광법회를 설립한 광덕스님을 빼 놓을 수 없다는 문제제기와 함께 대각교운동은 미래지향적 새불교 운동이었으며 이미 항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된 민족적 차원의 운동이었음을 강조했다. 정토회의 북한동포돕기 운동에 대해서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먼저이고, 인도적 지원이 씨앗이라면 북한의 자유는 열매가 될 것이라는 옹호적 의견을 밝혔다.
진각대학원 김경집 교수는 ‘부처님 정법의 계승과 전파’라고 하기에는 발표의 폭에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고 전제한 뒤, 대각사상의 중심은 중생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불성의 체득이라며 용성이 보여준 대각의 다양한 전파 방법에 대해 보충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두 번째 주제는 ‘시대정신, 독립운동’이라는 제목으로 한국국학진흥원 김순석 연구위원이 발표하였다. 그는 용성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 역사가 단절되는 암흑기요, 시련기였다고 당대를 정리하며 이러한 시대상황과의 인과관계 하에서 용성의 활동을 조명하겠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용성은 출가 승려로서 항상 본분사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그가 전개한 독립운동은 비폭력•무저항주의에 입각한 것이었고 자유와 평화를 추구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이 독립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의 조선통치가 옳지 않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조선의 독립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은 소중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불교사상적 측면에서 조선의 독립은 마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용성이 만주 용정에 농장을 마련한 것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은신처와 자금을 제공해 주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는 세속의 일을 넘나들면서 유연하게 처신하였지만 늘 승려로서의 원칙을 따랐다. 용성은 평생을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되돌려주고 조선이 독립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두 번째 발표에 대한 논평에서 수원박물관 한동민 학예팀장은 임제종운동이 각지에 산재한 항일적 승려를 결집해 내었으며 만해와 용성이 근대 불교계에 지도자로 우뚝 서게 만든 사건으로 항일불교의 진전을 보여주었다고 적극적인 평가를 내렸다. 또한 불교근대화의 일환으로 불교개혁을 추진한 용성이 역경불교•참선불교를 넘어 제도권을 이탈, 독자적으로 나아간 것이 대각교 선언이라고 의견을 피력하였다.
한편, 통일연구원 조민 연구위원은 근래의 역사 연구가 구술사, 관계사 등을 적극 채택하고 있는 점을 상기시키며 특히 독립운동이나 반독재투쟁은 기록을 남기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식적인 자료만을 인용하면 사건의 전모와 진실을 볼 수 없으며 개연성 높은 구술과 관계상황논리를 살펴야 함을 지적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왕국이나 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용어를 용성이 가장 먼저 사용한 점이나 태극기 사용을 주창한 점에 대해 다른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토론 막바지에 조성택 교수는 근대 불교를 다루는 연구에는 어디서나 만해가 비교대상으로 등장한다며, 그가 근대불교의 뛰어난 연구자이고 훌륭한 독립운동가인 점은 분명하지만 불교인으로서보다는 특출한 근대지성이고 시인으로서의 입지가 강하므로 만해를 걷어내야 다른 인물들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가능해진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관심을 끌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법륜스님의 정리 말씀이 있었다. 법륜스님은 실제 용성과 대중이 알고 있는 용성 사이에 간격이 너무 크다는 말씀과 함께 용성의 행적과 사상에 대해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 연구가 있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3•1운동의 드러난 모습은 이와 같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다며 용성조사의 스승인 해월화상이 천도교 최제우 선생과 매우 밀접한 사이였다는 점, 도문스님의 아버지인 임철호 선생이 윤봉길 의사의 친구이며 두 사람이 함께 용성조사로부터 5계를 수계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이해의 각도가 달라질 거라고 말씀하였다. 또 현실에서 불법을 전하면서 바른불교, 쉬운불교, 생활불교를 모토로 삼았는데 나중에 보니 용성조사께서 말씀하신 것과 거의 같아서 대단히 앞서가신 분이 아닌가 생각했다는 개인적 경험, 현재의 조계종도 용성 불교의식집을 못따라간다는 말씀도 하였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자리를 떠난 대중은 거의 없었다. 스승을 기리는 일이 이와 같아서 모든 게 쉽고 매끄럽게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으나 조사께서 남기신 자취가 저마다의 가슴에 하나씩은 남았으리라. 이제 이날의 공부가 준 성과와 과제 모두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일이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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