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의 길에서 다시 쓰는 출사표(出師表) - 대북인식의 견해차와 남남갈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
북한의 핵개발과 3대 세습독재로 우리 사회의 대북인식이 보수나 진보 구분 없이 전반적으로 나빠졌다. 그러나 대북인식의 차이로 인한 남남갈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한국정치에서 남북문제에 대한 견해차는 보수와 진보 진영을 나누는 시금석이다.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등 우리의 장래를 위해 지향하는 가치의 우선순위보다 대북관이 어떠냐가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간편하고 최종적인 기준이 된다.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의 길에서 다시 쓰는 출사표(出師表)
- 대북인식의 견해차와 남남갈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
고경빈(평화재단 평화연구원 운영위원장)
대북관의 차이, 한국 정치토론의 종결자
북한의 핵개발과 3대 세습독재로 우리 사회의 대북인식이 보수나 진보 구분 없이 전반적으로 나빠졌다. 그러나 대북인식의 차이로 인한 남남갈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한국정치에서 남북문제에 대한 견해차는 보수와 진보 진영을 나누는 시금석이다.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등 우리의 장래를 위해 지향하는 가치의 우선순위보다 대북관이 어떠냐가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간편하고 최종적인 기준이 된다.
정치적 토론과정에서 이해관계가 복잡해져 피아(彼我)식별이 애매해지거나 여론전이 요구될 때, 대북관을 확인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은 자기 진영을 결집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아주 저렴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색깔론의 깃발이 나부끼면 당초의 토론에서 문제시되었던 현안에 대한 시시비비는 사라지고 상대 진영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시작된다. 토론은 투쟁이 되고 서로의 거리를 확인하며 상황은 결론 없이 종료된다. 북한관의 차이로 인한 남남갈등은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불신만 남기며 민주주의 토론을 무화(無化)시키는 블랙홀이 된다.
북한이나 남북문제가 남남갈등의 직접적인 소재가 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초당적으로 추진해야 할 안보나 대북정책에 대한 남남갈등은 이적행위(利敵行爲)나 적전분열(敵前分裂)로 받아들여지고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적대감을 쌓아 올린다. 선거 때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진다. 대북문제를 둘러싼 남남갈등은 후보자간 정책노선이나 선거공약을 주의 깊게 살펴 볼 수 없게 만든다. 대북관의 차이는 한국정치 토론의 종결자이다.
남남갈등, 극복의 시작은 갈등의 긍정
수시로 반복되는 남남갈등은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통일 노력에 장애가 될 뿐이다. 그래서 대북문제에 대해서는 국론을 통일해 한 목소리를 낼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쉽지가 않다. 모두 자기 진영의 입장에 국론이 결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북관이 한국정치의 진영 구분 기준이 되어 있는 마당에 양측이 같은 대북인식을 공유하고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북인식이 진영 구분의 감별사(鑑別師) 역할을 하게 된 것은 한국적 현실여건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며, 통일될 때까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입장을 양보하여 대북관의 차이를 좁히는 일이 어려운 것은 한국인이 각자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할 때 불가불 한반도 분단현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한국인으로서 한국사회에 살아가면서 한반도 분단이라는 현실적 제약과 규정의 구속을 벗어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 분단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 그의 정체성이 보수나 진보로 형성되게 된다. 어느 쪽이 옳은가에는 정답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론통일을 위해 보수든 진보든 대북관의 차이를 불문하고 국론을 통일하라는 요구는 자기 정체성을 재구성하지 않고는 수행하기 불가능한 명령이다. 부정이 불가능하다면 긍정하는 수밖에 없다. 암(癌)투병을 위한 첫 걸음으로 암과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남남갈등이라는 골칫거리를 극복하기 위해 남남갈등의 존재를 우리 분단현실의 일부라고 긍정(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갈등이라는 용어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갈등은 국론통일의 명분으로 우리 사회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북인식의 차이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일 수도 있다. 남북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 차이를 긍정하는 순간, 문제의 절반은 해소될 것이며 나머지 절반도 소통을 통해 극복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대북인식, 두 개의 눈
남북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의 존재는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북정책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통일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실보다 득이 되는 점이 많다. 먼저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왜 다양한 대북관점이 필요한지를 보자.
첫째,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최소 둘 이상의 관점이 필요하다. 날아오는 북한 미사일의 정확한 탄도를 파악하거나, 야전포병이 북한표적의 좌표를 특정하기 위해서도 최소 두 곳 이상에 관측소를 운영해야 하는 것과 같다. 관찰지점을 하나로 통일하여 운영하면 측정하려는 물체의 좌표를 확정할 수 없다. 측량기술에서도 사용하는 과학적 원리다.
둘째, 통제사회인 북한의 정보는 은폐되고 조작되어 있어서 북한의 동태와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러 관점에서 지켜보아야 한다. 북한은 언제나 우리 대북정책의 의도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려고 나름대로 대응하며 또한 예상 못한 돌발변수의 발생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북관계는 상대의 수(手)를 읽는 바둑과 같다. 수가 막히면 진다. 상대방 움직임의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정책을 입안하고 끊임이 수정하면서 대응해야 한다. 이럴 때 유념해야 문제는 스스로 독단과 희망적 사고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스스로 희망적 사고에 빠지거나 대북정책 정당성을 자가발전(自家發電)하는 상황에 매몰되면 남북관계 상황예측에서 특정 시나리오에 집착할 위험성이 크다. 우리가 원치 않는 가능성이라고 배제하거나, 반대로 특정 가능성에만 선택적으로 매달리면 바둑에서 진다. 거북해도 바둑 훈수를 하는 다양한 견해가 도움이 된다. 국론을 통일하여 대북시각을 하나만 허용하는 것은 득(得)보다 실(失)이 될 수 있다.
대북정책, 두 개의 날개
다양한 대북시각의 존재는 한반도 평화와 평화적 통일이라는 우리의 목표와 의지가 궤도를 잃지 않도록 하는데도 기여한다.
첫째, 한반도 현실에서 북한은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는 교전 상대지만 통일 미래를 함께 해야 하는 상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적(敵)임과 동시에 통일 미래의 동반자라는 이중적 관점은 우리의 대북 정책에서 항상 견지되어야 한다. 둘 중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다. 남북관계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안보를 소홀히 할 수 없듯이,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남북관계의 모든 끈을 잘라 버릴 수는 없다. 우리가 통일을 단념하고 북한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남북관계가 아무리 절망적이고 악화되었다 해도 평화통일 관점을 버리면 안 된다. 안보는 안보대로 튼튼히 하면서 남북관계발전 노력은 노력대로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이다.
둘째, 대북정책이 시행착오를 줄이고 정당성을 얻으려면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한다. 다양한 시각으로부터의 비판을 수용하여 예상치 못했던 결점과 미비점을 수정하면 정책실패를 막고 정책품질을 높일 수 있다. 이러한 기회를 스스로 봉쇄한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결국 붕괴했다. 국론통일을 위해 하나의 대북인식만 허용한다면 통치자는 편리하겠지만 국익추구에 오히려 어려움을 줄 수 있다. 어차피 대북정책의 최종책임은 집권 진영이 진다. 대북정책이 비판과 소통을 통해 품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비판 진영에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집권 진영의 이익이다. 대북정책과 관련된 비판과 소통의 유의미한 소득은 자기 주장의 무흠결을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스스로의 결점과 미비점을 찾는데 두어야 한다.
평화를 수호하고 평화통일의 항로(航路)를 가기 위해서는 갈등 없이 봉합된 통일된 하나의 날개보다 다소 갈등이 있더라도 두 개의 날개가 필요하다. 이런 이치를 인정한다면 보수 진보가 자기 진영의 대북관점을 포기하고 중도(中道)라는 어설픈 타협을 모색하는 일도 불필요하다. 오히려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북한을 파악하기 위한 눈도, 평화통일의 길을 나는 날개도 좌우 둘 씩 필요한 것은 미관(美觀)상의 요구가 아니다. 기능상 꼭 필요한 것이다.
통일준비, 동일화보다 다양화를 용납하는 노력
우리 현실에서 보수 진보가 자기 정체성을 희생하며 대북관을 통일하는 것은 극히 어렵기 때문에 차라리 다양한 인식을 긍정하는 것이 득이 된다고 앞서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초당적인 대북정책 추진을 위해 국론통일이 필요하다는 문제도 다양한 대북인식의 존재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시도해 볼 수 있다.
보수 진보가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자기와는 명백히 다른 상대 진영의 대북인식 중에 나름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소통을 통해 점차 늘려가는 방법이다. 양측이 소통하다 보면 상대방 주장에 결코 동의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사력을 다해 상대방의 생각이 틀렸다고 설복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 생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와는 비록 다른 생각이지만 틀렸다고도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영역을 점차 넓혀가는 노력이 국론을 결집하는 실용적 접근이 될 수 있다. 국론통일을 위해 보수와 진보가 획일적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서 있는 입지를 인정하는 접근법이다. 보수와 진보의 교집합(CAP)이 아니라 합집합(CUP)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견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국론통일의 방식이다.
30년 전 면책특권을 가진 국회의원이 우리나라의 국시(國是)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대정부질문을 했다가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국보법으로 처벌받았다. 당시 보수는 이런 과격(?)주장을 용납하지 못했지만, 지금 보수는 반공이라는 자기 정체성의 희생 없이 통일 주장을 받아들인다. 내용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상대의 주장을 용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의지를 가지고 공들여 추진한다면 대북정책을 둘러싼 많은 갈등이 해소될 것이다.
동일한 인식 하나로 국론통일을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우리현실에서 억지로 대북인식의 단일화(동일화)를 추구하는 것은 남남갈등의 재생산을 유발시킨다. 다양성을 훼손하며 동일화를 추구하는 것은 북한방식의 통일이지, 개성의 다양성과 양심의 자유를 헌법적 가치로 추구하는 대한민국의 방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다양한 대북인식을 긍정하는 일,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향한 길에서 새로 써보는 출사표의 핵심적인 전략이다.
※ 이 글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평화재단의 사업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난 칼럼>
① 2017년 한국,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조 민 평화교육원 원장,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
② 미‧중‧일 국가주의 충돌에 직면한 한국외교는 어디로? (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 )
- 대북인식의 견해차와 남남갈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
고경빈(평화재단 평화연구원 운영위원장)
대북관의 차이, 한국 정치토론의 종결자
북한의 핵개발과 3대 세습독재로 우리 사회의 대북인식이 보수나 진보 구분 없이 전반적으로 나빠졌다. 그러나 대북인식의 차이로 인한 남남갈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한국정치에서 남북문제에 대한 견해차는 보수와 진보 진영을 나누는 시금석이다.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등 우리의 장래를 위해 지향하는 가치의 우선순위보다 대북관이 어떠냐가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간편하고 최종적인 기준이 된다.
정치적 토론과정에서 이해관계가 복잡해져 피아(彼我)식별이 애매해지거나 여론전이 요구될 때, 대북관을 확인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은 자기 진영을 결집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아주 저렴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색깔론의 깃발이 나부끼면 당초의 토론에서 문제시되었던 현안에 대한 시시비비는 사라지고 상대 진영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시작된다. 토론은 투쟁이 되고 서로의 거리를 확인하며 상황은 결론 없이 종료된다. 북한관의 차이로 인한 남남갈등은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불신만 남기며 민주주의 토론을 무화(無化)시키는 블랙홀이 된다.
북한이나 남북문제가 남남갈등의 직접적인 소재가 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초당적으로 추진해야 할 안보나 대북정책에 대한 남남갈등은 이적행위(利敵行爲)나 적전분열(敵前分裂)로 받아들여지고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적대감을 쌓아 올린다. 선거 때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진다. 대북문제를 둘러싼 남남갈등은 후보자간 정책노선이나 선거공약을 주의 깊게 살펴 볼 수 없게 만든다. 대북관의 차이는 한국정치 토론의 종결자이다.
남남갈등, 극복의 시작은 갈등의 긍정
수시로 반복되는 남남갈등은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통일 노력에 장애가 될 뿐이다. 그래서 대북문제에 대해서는 국론을 통일해 한 목소리를 낼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쉽지가 않다. 모두 자기 진영의 입장에 국론이 결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북관이 한국정치의 진영 구분 기준이 되어 있는 마당에 양측이 같은 대북인식을 공유하고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북인식이 진영 구분의 감별사(鑑別師) 역할을 하게 된 것은 한국적 현실여건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며, 통일될 때까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입장을 양보하여 대북관의 차이를 좁히는 일이 어려운 것은 한국인이 각자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할 때 불가불 한반도 분단현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한국인으로서 한국사회에 살아가면서 한반도 분단이라는 현실적 제약과 규정의 구속을 벗어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 분단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 그의 정체성이 보수나 진보로 형성되게 된다. 어느 쪽이 옳은가에는 정답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론통일을 위해 보수든 진보든 대북관의 차이를 불문하고 국론을 통일하라는 요구는 자기 정체성을 재구성하지 않고는 수행하기 불가능한 명령이다. 부정이 불가능하다면 긍정하는 수밖에 없다. 암(癌)투병을 위한 첫 걸음으로 암과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남남갈등이라는 골칫거리를 극복하기 위해 남남갈등의 존재를 우리 분단현실의 일부라고 긍정(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갈등이라는 용어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갈등은 국론통일의 명분으로 우리 사회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북인식의 차이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일 수도 있다. 남북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 차이를 긍정하는 순간, 문제의 절반은 해소될 것이며 나머지 절반도 소통을 통해 극복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대북인식, 두 개의 눈
남북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의 존재는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북정책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통일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실보다 득이 되는 점이 많다. 먼저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왜 다양한 대북관점이 필요한지를 보자.
첫째,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최소 둘 이상의 관점이 필요하다. 날아오는 북한 미사일의 정확한 탄도를 파악하거나, 야전포병이 북한표적의 좌표를 특정하기 위해서도 최소 두 곳 이상에 관측소를 운영해야 하는 것과 같다. 관찰지점을 하나로 통일하여 운영하면 측정하려는 물체의 좌표를 확정할 수 없다. 측량기술에서도 사용하는 과학적 원리다.
둘째, 통제사회인 북한의 정보는 은폐되고 조작되어 있어서 북한의 동태와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러 관점에서 지켜보아야 한다. 북한은 언제나 우리 대북정책의 의도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려고 나름대로 대응하며 또한 예상 못한 돌발변수의 발생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북관계는 상대의 수(手)를 읽는 바둑과 같다. 수가 막히면 진다. 상대방 움직임의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정책을 입안하고 끊임이 수정하면서 대응해야 한다. 이럴 때 유념해야 문제는 스스로 독단과 희망적 사고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스스로 희망적 사고에 빠지거나 대북정책 정당성을 자가발전(自家發電)하는 상황에 매몰되면 남북관계 상황예측에서 특정 시나리오에 집착할 위험성이 크다. 우리가 원치 않는 가능성이라고 배제하거나, 반대로 특정 가능성에만 선택적으로 매달리면 바둑에서 진다. 거북해도 바둑 훈수를 하는 다양한 견해가 도움이 된다. 국론을 통일하여 대북시각을 하나만 허용하는 것은 득(得)보다 실(失)이 될 수 있다.
대북정책, 두 개의 날개
다양한 대북시각의 존재는 한반도 평화와 평화적 통일이라는 우리의 목표와 의지가 궤도를 잃지 않도록 하는데도 기여한다.
첫째, 한반도 현실에서 북한은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는 교전 상대지만 통일 미래를 함께 해야 하는 상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적(敵)임과 동시에 통일 미래의 동반자라는 이중적 관점은 우리의 대북 정책에서 항상 견지되어야 한다. 둘 중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다. 남북관계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안보를 소홀히 할 수 없듯이,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남북관계의 모든 끈을 잘라 버릴 수는 없다. 우리가 통일을 단념하고 북한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남북관계가 아무리 절망적이고 악화되었다 해도 평화통일 관점을 버리면 안 된다. 안보는 안보대로 튼튼히 하면서 남북관계발전 노력은 노력대로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이다.
둘째, 대북정책이 시행착오를 줄이고 정당성을 얻으려면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한다. 다양한 시각으로부터의 비판을 수용하여 예상치 못했던 결점과 미비점을 수정하면 정책실패를 막고 정책품질을 높일 수 있다. 이러한 기회를 스스로 봉쇄한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결국 붕괴했다. 국론통일을 위해 하나의 대북인식만 허용한다면 통치자는 편리하겠지만 국익추구에 오히려 어려움을 줄 수 있다. 어차피 대북정책의 최종책임은 집권 진영이 진다. 대북정책이 비판과 소통을 통해 품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비판 진영에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집권 진영의 이익이다. 대북정책과 관련된 비판과 소통의 유의미한 소득은 자기 주장의 무흠결을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스스로의 결점과 미비점을 찾는데 두어야 한다.
평화를 수호하고 평화통일의 항로(航路)를 가기 위해서는 갈등 없이 봉합된 통일된 하나의 날개보다 다소 갈등이 있더라도 두 개의 날개가 필요하다. 이런 이치를 인정한다면 보수 진보가 자기 진영의 대북관점을 포기하고 중도(中道)라는 어설픈 타협을 모색하는 일도 불필요하다. 오히려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북한을 파악하기 위한 눈도, 평화통일의 길을 나는 날개도 좌우 둘 씩 필요한 것은 미관(美觀)상의 요구가 아니다. 기능상 꼭 필요한 것이다.
통일준비, 동일화보다 다양화를 용납하는 노력
우리 현실에서 보수 진보가 자기 정체성을 희생하며 대북관을 통일하는 것은 극히 어렵기 때문에 차라리 다양한 인식을 긍정하는 것이 득이 된다고 앞서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초당적인 대북정책 추진을 위해 국론통일이 필요하다는 문제도 다양한 대북인식의 존재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시도해 볼 수 있다.
보수 진보가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자기와는 명백히 다른 상대 진영의 대북인식 중에 나름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소통을 통해 점차 늘려가는 방법이다. 양측이 소통하다 보면 상대방 주장에 결코 동의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사력을 다해 상대방의 생각이 틀렸다고 설복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 생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와는 비록 다른 생각이지만 틀렸다고도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영역을 점차 넓혀가는 노력이 국론을 결집하는 실용적 접근이 될 수 있다. 국론통일을 위해 보수와 진보가 획일적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서 있는 입지를 인정하는 접근법이다. 보수와 진보의 교집합(CAP)이 아니라 합집합(CUP)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견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국론통일의 방식이다.
30년 전 면책특권을 가진 국회의원이 우리나라의 국시(國是)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대정부질문을 했다가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국보법으로 처벌받았다. 당시 보수는 이런 과격(?)주장을 용납하지 못했지만, 지금 보수는 반공이라는 자기 정체성의 희생 없이 통일 주장을 받아들인다. 내용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상대의 주장을 용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의지를 가지고 공들여 추진한다면 대북정책을 둘러싼 많은 갈등이 해소될 것이다.
동일한 인식 하나로 국론통일을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우리현실에서 억지로 대북인식의 단일화(동일화)를 추구하는 것은 남남갈등의 재생산을 유발시킨다. 다양성을 훼손하며 동일화를 추구하는 것은 북한방식의 통일이지, 개성의 다양성과 양심의 자유를 헌법적 가치로 추구하는 대한민국의 방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다양한 대북인식을 긍정하는 일,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향한 길에서 새로 써보는 출사표의 핵심적인 전략이다.
※ 이 글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평화재단의 사업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난 칼럼>
① 2017년 한국,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조 민 평화교육원 원장,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
② 미‧중‧일 국가주의 충돌에 직면한 한국외교는 어디로? (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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