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차 전문가포럼
미중전략경쟁과 양안갈등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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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0
미중전략경쟁과 양안갈등의 이해
올해는 한중 수교 30주년이자, 대만과 단교한 지 30년이 된 해이다. 대만의 지난 30년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 대내외 상황에 대해서 한국 최고의 대만 전문가인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를 모시고 분석해 보고자 한다.
개요
- 일시 :
- 2월10일(목) 12:30~14:00
- 발표 :
- 강준영(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 사회 :
- 황재호 (한국외국어대 국제학부 교수
최근 대만의 코로나 대응에 대한 국제사회의 긍정적인 평가가 높았고, 미국 일본 등의 강대국들의 대만과의 고위급 교류, 또 반도체 기업을 중심으로 경제 성과가 두드러졌다. 유럽 몇 나라와는 수교 소식도 들리는 등 대만이 상당히 선전하는 분위기이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작년 역사 결의를 하면서 대만에 대한 여전히 강한 정책의지를 보여주었고, 지난 해 연말 미중 정상회담에서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미국으로부터 확인받았다.
그러나 미중 전략적 경쟁이라는 외교안보상의 환경 변화로 대만에게는 상당히 보기 드문 기회가 찾아왔다.
올해는 한중 수교 30주년이자, 대만과 단교한 지 30년이 된 해이다. 대만의 지난 30년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 대내외 상황에 대해서 한국 최고의 대만 전문가인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를 모시고 분석해 보고자 한다.
1부. 발표
현대 대만의 이해
중국과 대만의 관계, 이른바 양안관계는 한반도의 남북관계가 그렇듯 미국이라는 거대 국가가 뒤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의 다자 관계다. 2021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만 해협의 안정과 평화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최근 중국의 대만 압박 훈련이 거의 상시화되면서 중국의 대만 침공의 위험성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중국과 수교하는 국가는 대만과 단교를 해야 한다. 한국도 199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한 지 30년이 되었다(현재 대만은 14개 국가와만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만은 군사, 외교력을 가지고 국가지도자를 선출하는 등 국가 통치 행위를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대만을 사실상의 국가로 바라보고 있다.
대만의 공식 국호는 중화민국이다. 중국은 1949년에 중화민국은 소멸됐고 그 법통을 이어받아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기 때문에 중화민국은 소실된 국가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대만은 내전에서 진 후 1949년에 대만으로 와서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건설했으므로 현재 중화민국은 대만에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중국의 반대로 국제무대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차이니즈 타이베이라는 국호를 쓰고 있다.
대만의 면적은 남한의 ⅔ 정도, 인구는 2350만 정도이다.
1949년에 중국 본토에서 패퇴한 장제스 정부가 넘어오면서 표준 중국어가 공용어이지만 원래 중국의 복건성에서 건너온 이들이 쓰는 사투리인 민남어와 광동 지방에서 넘어온 객가인들이 쓰는 객가어가 상용어로 쓰인다. 아열대성 해양기후이다.
지정학적으로 대만은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다. 대만이 없으면 중국의 전체적인 해안선이 완전히 중국에 의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만은 미국의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미국에게 대만은 포기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문화적으로도 대만은 동서 문화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해양 시대에 대만을 발견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사람들은 기후도 좋고 과일이 풍부한 이 섬을 보물섬(포모사)이라 불렀다.
대만은 줄곧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 왔다. 1624~1662년까지는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 청이 명을 멸망시키자 명나라의 정성공이라는 사람이 유민을 이끌고 와서 중국의 유학 교육제도를 대만에 이식한다. 나중에는 청나라가 200년간 통치했지만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고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어 일본에 대만을 할양하기 전까지 대만은 거의 버려진 섬이었다.
이후 50년간 일제의 통치를 받다가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본토에서 넘어왔고, 2000년에 대만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천수이볜이라는 민진당 대통령이 나올 때까지 국민당이 줄곧 대만을 통치해왔다.
대만은 태평양 폴리네시아 계열의 원주민 토착문화, 스페인 문화, 중국 본토에서 넘어온 문화가 뒤섞여 민족 구성, 인문, 풍토가 복잡하다.
중국 본토에서는 민남 지역이라고도 하는 복건성에서 70%, 광동에서 14%가 넘어왔고 장제스 국민당이 올 때 약 200만 명이 같이 왔다.
산지족, 고산족이라 부르는 원주민은 50만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 최근에는 대만 남성들도 결혼하기가 어려워져 약 50만명의 중국 출신 여성들과 결혼하면서 중국-대만 다문화가정 인구도 약 150만명에 이른다.
외세의 침탈에 시달린 영향인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남을 잘 못 믿으며 물질에 밝은 편이고, 한때 대만 주식시장이 세계 3대 주식시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정치 체제는 입법, 행정, 사법 외에 모든 시험을 관장하는 고시원, 감사원에 해당하는 감찰원의 5권 분립 체제의 민주공화국이다. 2016년 선거에서 차이잉원이 총통으로 당선이 됐고 2020년 1월에 재선에 성공했는데 재선 당시 지지율이 9%로 고전하던 차이잉원을 당선시킨 것은 홍콩사태의 영향이 컸다.
현 집권당인 민주진보당의 목표는 대만 독립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반면 중국에서 넘어온 국민당은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94년에 흥중(興中, 중국을 흥하게 하자)을 모토로 창설되어 120년이 넘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오래된 정당이다.
대만은 계속 국민당 일당 체제로 관제언론만이 존재하다가 장제스의 아들인 장경국 총통이 창당과 언론 통제를 해제함으로써 1986년 민주진보당이 창당됐고, 자유언론이 대거 창립되면서 정치 민주화가 이루오졌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정당 신고제여서 240여개의 당이 난립하고 언론기관도 다양하다.
민진당을 위시한 범녹색 계열은 대만 독립 성향을 많이 가지고 있고 국민당 쪽은 남색 진영이라고 해서 ‘남록이 싸운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표현만 그러할 뿐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이루어 낸 성과를 갖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 사실 두려운 것은 이런 면이다.
국제 관계는 아무래도 중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너무 왜소하다. 중국이 대만의 국제 활동공간을 제약한 탓에 수교국이 14개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대만이 계속 중국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면 다 없어질 거라고 중국은 협박을 하고 있다. 그리고 대만은 현재 41개의 국제기구에 들어가 있는데 국제기구도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대만에 공간을 잘 안 내주고 있다.
천수이볜 민진당 정권이 끝나고 국민당 소속의 마잉주 총통이 8년을 통치할 때는 대만과 중국이 굉장히 사이가 가까워서 국제 공간도 좀 넓게 열어줬는데, 그런데 다시 민진당의 차이잉원이 집권하면서 다시 대만의 국제 공간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대만 - 통일? 독립? 현상유지?
대만의 독립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통일은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가 문제다. 결국 현상 유지 여론(그래프 검은색, 파란색)이 항상 70% 정도로 다수이다.
다만 집권당인 민진당은 독립 성향의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국민 여론도 대만에서 나고 자란 2세대들이 성장하면서 본토에서 건너온 1세대에 비해 중국과 다른 대만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성향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4개의 독립성향 세력이 연합해 탄생한 민진당 안에는 초강경파, 강경파, 온건파, 중도파가 있는데 2000~2008년 집권한 천수이볜 정부는 대만 공화국 건설, 중국과의 거리 두기, 독자성 확보에 초점을 맞췄다면, 차이잉원은 그에 비해 강경 독립주의자는 아니다.
그런데 천수이볜 정부가 탈중국 강경책을 실시한 결과 악화된 중국과의 관계를 마잉주 국민당 정부가 다시 회복시킨 상황에서 집권한 차이잉원으로서는 대만의 독자성을 이전처럼 무턱대고 앞세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탈중국을 하되 그 공백을 대미 대일 외교 강화로 하려하고 있다.
당시는 트럼프 정부가 대중 압박을 강화하던 시절이어서, 미국은 인도 태평양 전략에서 중국의 아픈 손가락인 대만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 대만을 국가처럼 대접하고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 반도체 회사인 TSMC 공장을 유치하는 등 전략적 지위를 높여주었다. 중국은 이에 강력 항의했다.
대미 대일 외교와 더불어 대만은 남향 정책, 아세안과의 교류 강화를 꾀한다. 1992년 리덩후이 총통이 펼친 남향정책을 차이잉원 총통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남향정책(지도 초록색 라인)은 중국의 해상 실크로드(지도 빨간색 라인)와 가는 곳마다 충돌하는 어려움이 있다.
2020년에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통을 겪는 와중에 유일하게 중국만 2% 성장을 했다. 그런데 더 놀랍게도 대만은 3.6%를 성장하여 내 후년쯤에는 한국의 1인당 GDP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를 세계적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인 TSMC와 전 세계의 아이폰을 독점 제조하는 업체인 팍스콘이다. 80년대 이후로 침체기에 빠졌던 대만 경제가 최근 다시 소생하고 있다.
양안 관계의 복잡성
양안 관계는 중국과 대만 사이에 있는 ‘대만 해협의 양측’이라는 뜻으로, 양측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아서 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언어가 학술 용어가 된 것이다. 여기에 홍콩을 더해 양안 삼지(양안의 세 지역)라는 표현을 쓴다.
양안관계는 복잡한 내부 요인을 갖고있다.
대만을 흡수해 민족 통일을 달성하려는 중국 공산당 정부,
독립국가 건설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민진당 등 대만 내 독립세력,
안정적 양안 관계 설정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고 지속가능한 경제발전 및 국제사회 생존공간을 확보하려는 국민당 정부,
여기에 대만을 대중 견제의 중간지대로 운용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모호성에서 최근 미국의 대만 중시 현상까지, 양안 관계는 경제협력, 정치적 화해, 미중갈등이 교차하는 복잡한 구조이다.
양안 관계는 전통적으로 3개의 쟁점이 있다.
첫째, ‘하나의 중국’ 원칙을 둘러싼 쟁점이다. 중국과 대만은 1992년 9.2.공식(9.2.컨센선스)을 통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했다. 단 하나의 중국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구두로 표현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이 92공식의 인정여부를 가지고 중국은 대만의 양안 관계 교류 지속 여부를 판단하는 바로미터로 삼고 있다.
그런데 차이잉원은 92공식을 부정하고 2020년 선거에서 92공식을 대만 공식(타이완 컨센선스)로 바꿔야 된다는 슬로건을 들고 나온다.
차이잉원은 기본적으로 중국과 대만이 서로 다른 민족, 다른 국가라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넘어온 국민당이 잠시 지배를 했던 것뿐이며 대만은 중국과 상관없는 주권국가라는 입장이다.
사실 중국 본토에서 넘어온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 민족주의 측면에서는 뿌리가 유사하다고 할 수있다. 장제스도 마오쩌둥도 저우언라이도 신해 혁명으로 청제국을 청산하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데 고나심을 가졌던 지식인들이었다. 가는 길은 달랐지만 기본적으로는 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민주진보당은 근본적으로 뿌리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통일에 반대하는 것이다.
둘째는, 일국양제이다. 이는 1984년에 홍콩을 중국에 복귀시키기 위한 중국 조자양 총리와 영국 마거릿 대처 수상 간 담판에서 덩샤오핑이 제안한 모델이다. 여기에는 1997년부터 50년간 홍콩에 고도의 자치를 허용한다는 시한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작년 홍콩사태로 다 뒤집어졌다. 이렇게 되니 일국양제를 대만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독립성향의 민진당은 대만은 이미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국가 대 국가의 관계라는 입장이므로 일국양제에 대해 근본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세번째는 중국의 ‘무력 사용 불배제’론이다. 여기에는 네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째,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는 경우,
둘째, 대만이 독립선언에 준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
셋째, 대만 문제에 외세가 개입하는 경우,
넷째, 대만이 통일 협상을 지연하는 경우, 이 네 가지 경우 무력 사용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대만이 이에 대해 ‘중국이 양안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면서 무력사용 불 배제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항의하자 시진핑은 처움에는 평화를 강조했지만 2019년 장쩌민이 8개항의 대만 방침을 발표한 40주년 기념식에서 다시 ‘무력사용 불배제’를 들고 나왔다.
사실 대만령인 금문도, 마조도, 팽호도 등의 작은 섬들은 중국 복건성에서 5km에 불과한 거리다. 중국이 점령을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무력 사용이 가져올 파장을 고려해서 안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 상호 경제 의존도가 굉장히 깊다는 점도 한몫 하고 있다. 2020년 대만 경제 성장의 40%는 중국에 수출한 반도체 효과에서 기인한 것이다. 싸우면서도 중국은 대만 반도체가 필요하고 대만도 중국 시장이 필요한 것이다.
어쨌든 무력사용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통일 후 비전을 제시한 시진핑과 대만정치에 무분별한 개입을 하지 말고 대만의 존재를 직시할 것을 요구하는 차이잉원의 극명한 차이 때문에 향후의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하다.
미-중-대 삼각관계
1979년 미국은 대만과 단교하면서 유명한 ‘대만 관계법’을 만들었다. 간단히 말해 ‘대만이 위기에 처하면 미국이 개입하겠다’는 것이며, 위기에 처하지 않도록 무기 판매 등을 통해 대만을 보호하겠다는 내용이다.
또 미국은 중국과의 3개 연합 공보(1972년 상해 공보, 1979년 수교 공보, 1982년 8.17 공보)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합의하고 대만에 무기 판매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만에도 이른바 ‘6항보증[1]’을 통해 지원을 약속했다. ‘대만 관계법’과 ‘6항보장’법은 대만에게 든든한 배후가 되어 주고 있다.
게다가 트럼프-바이든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대만의 전략 지위를 높여주는 다양한 법안을 만들었고 무기도 계속 판매하고 있다. 무역 패권, 기술 패권, 인권 가치 논쟁과 더불어 대만 문제는 미중 전략 갈등에서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양안, 무력충돌?
미국의 인도 태평양 사령관 아퀼리노가 중국의 대만 침공 우려를 언급하고, 전 인도 태평양 사령관 데이비슨도 중국이 6년 이내에 대만에 군사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해 양안 충돌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여기에는 미국의 군산복합논리도 어느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대만을 영토 문제가 아니라 ‘통일 문제'로 접근한다. 여기에 대해서 대만은 아시아에서의 민주 가치 수호의 필요성을 앞세워 미국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미국의 지속적인 대만 우호 조치에 중국이 군사적 반발로 대만을 자극하고, 미국과 중국이 연쇄 맞대응하는 형태가 뉴노멀이 되면서 양안 간 군사 충돌의 위험성이 급격히 대두되고 있다. 분명해진 중국의 굴기로 양안 간 힘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고, 지정학적 균형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좁혀진 미중 국력차와 중국의 민족주의 성향, 3선을 추구하는 시진핑의 새로운 지도부 구성에 대한 조급함이 겹치면서 새로운 파장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대만 침공 조건에 최근 몇 개가 추가되었다. 핵심은 대만이 핵무기를 보유하거나 대만 섬 내에 외국군이 주둔하는 것 등이며, 중국 군부에서는 대만 섬 내 대규모 동란이 발생해도 중국이 대만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만 국방부가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를 공개를 했는데. 사실 결과적으로 대만이 중국과의 충돌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여기에 336시간(14일)과 72시간(3일) 논쟁이 있다. 72시간만 버티면 미국이 지원하러 오지만 만약 안 오면 14일 만에 중국에게 점령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침공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낮다. 전면 침공은 미국의 개입을 부를 수 있고, 지형적으로 대만은 대규모 상륙작전이 용이하지 않은 곳이다.
대만 본섬 완전 점령이 어렵다면 주변 도서를 점령하거나 대만에 경제적 압박을 가하기 위한 해상봉쇄도 가능하지만 이는 대만으로 하여금 본섬 대비태세를 강화하게 만드는 역효과만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국지적 충돌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상존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향후 중국은 설득과정을 통한 평화통일, 전쟁을 통한 통일, 협박을 통한 비무력적 통일, 일국양제 이외의 통일 방식 등으로 통일을 도모할 수 있다.
사실 대만이 제일 걱정하는 것은 봉쇄다. 예를 들어 1994년 장쩌민 시절에 대만 해협에 미사일 훈련이 일어났을 때 대만의 자산이 3일동안 하루에 100조씩 빠져나갔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중국은 비대칭적인 국제지위를 활용해 대만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고 대만의 금융과 증시 불안 및 사회동요를 만드는 하이브리드 전을 쓸 가능성이 크다.
2027년이 중국 인민해방군 창군 100주년이라 그 때 침공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 상황에서 중국이 그런 무리수를 둘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대 한반도 영향
당장의 무력충돌이나 중국의 대만 침공이 없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대만 해협은 우리나라 원유 수송의 70%를 차지하는 중요 수송로이며, 또 미국이 대만을 지키지 못한다면 한미 동맹이나 미일 동맹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미중갈등과 양안갈등은 한국에도 심각한 안보위기를 초래할 소지가 있다. 이는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과 관계가 있다.
한국이 할 수 있는 역할로는 한미 정상회담 등을 통해 대만해협과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지지하는 선언을 주도할 수 있다. 다만 한중 수교 시 언급한 ‘하나의 중국' 정책은 국가 간 약속이므로 계속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만과의 정치 외적인 교류에 대한 확대는 좀더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중국 못지않게 대만도 우리에게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생존 차원에서 양안 관계를 관심있게 바라봐야하기 때문이다
2부. 질의응답
Q. 대만 사회 발전사에서 박정희 식 개발독재 사례나 그와 유사한 경제 성장 전략이 있는지?
A.
대만 경제 성장 전략은 우리와 좀 달랐다. 대만은 사실 자원이 거의 없는 국가인데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본토에서 넘어올 때 금을 약 200톤 가지고 왔다고 한다. 금본위제를 통해 인플레를 억제하는 화폐 제도를 쓸 수 있어 차관을 조달해 개발한 한국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은 국가주도형 중공업 우선 정책을 통한 국부 모델인데 비해 대만은 민간중심형, 중소기업 중심의 경공업 정책을 통한 민부 모델이었다. 그래서 탄탄한 상위 중공업은 없지만 중소형 경공업은 상당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
당시에는 중국의 국력이 워낙 약해 대만을 견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중화민국의 국제지위를 1971년까지는 유지했다. 이를 통해 대만은 포츠담 선언, 카이로 얄타 회담 등에 항상 장제스가 참여했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 하나로 국제적 지위를 가지면서 성공적인 경제발전모델을 구축했다.
그리고 국민당의 시조인 쑨원의 삼민주의 중 민생주의는 토지공개념 등 약간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민생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적인 경제시스템도 대만 경제의 핵심이었다.
Q. 남북한은 긴장 국면이 발생하면 교류를 전면 중단하는데 양안 간에는 어떠한지? 그리고 중국에서 대만으로 귀순할 경우 대만에서는 이들을 맞이하고 보호하는 제도가 있는지?
A.
양안관계도 문제가 생기면 정부 간에는 교류를 닫는다. 그런데 민간 교류는 그게 불가능하다. 지금 중국에는 타이상(臺商/대만 상인)으로 불리는 약 150만~200만 명 정도의 대만 기업인이 있다. 대만 인구의 7~8%이다. 이미 교류가 굉장히 밀접하고 중국이 대만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서 굉장히 정책을 유연하게 시행한다. 예를 들어 대만 업체에서 중국의 영어교사 수준이 낮아 가족을 데리고 이주하기 싫다고 하면 영어교사를 대만사람이 직접 데리고 와서 고용하는 것도 허락해줄 정도다.
이렇게 민간 교류가 살아 있기 때문에 코로나 팬데믹 시국에서도 대만의 경제 성장을 견인할 수 있었다. 문화적으로도 교류의 폭과 깊이가 깊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관계가 악화되어도 민간 교류는 계속된다.
그리고 중국에서 대만으로 귀순하는 사례는 옛날에는 많았는데 지금은 대만이 특별히 더 살기 좋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진핑은 대만 동포들이 중국에 와서 중국의 경제 발전을 같이 향유하자는 ‘대만 동포 우대 31조항’이라는 것까지 발표해 경제적 종속을 꾀하고 있다.
아무튼 특별한 제도보다는 정착금을 주고 취업을 알선해주는 정도로 알고 있다. 대만이 워낙 작고 인재들도 대륙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중국 본토인들이 대만으로 와서 발전을 도모하기는 쉽지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어서 대만의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다.
Q. 대만은 단교 후 30년 동안 한국에 대한 여러 복잡한 정서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대만은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최근 한국의 반중 정서까지도 포함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A.
한중 수교 30년은 한 대만 단교 30년이다. 외교 관례상 수교를 하는 쪽이 단교를 당해 주는 게 관례여서 대만이 우리한테 단교 통보를 했다.
당시에는 사실 국민당이 여러 가지로 중국에 의해 코너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한국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면도 있었다. ‘장제스 총통이 한국 임시정부를 그렇게 보살펴주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배신을 하냐’ 이러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한 면도 있고 물론 우리도 끝까지 숨기고 아니라고 그러다 보니까 문제가 됐었다.
그런데 사실 대만은 놀랍게도 한류의 진원지이다. 장경국 사후 대만 출신의 리덩후이 총통이 당선됐다. 여전히 국민당 통치였지만 리덩후이는 국민당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고 정치 자금법에 손을 댔다. 그러면서 케이블 tv를 대량으로 허가해 주면서 정치자금을 조달했다. 채널이 3개에서 갑자기 60개가 되니까 방영할만한 콘텐츠가 부족했고, 그래서 그때부터 한국 드라마를 수입해 방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30년전의 대만의 한국에 대한 불편한 정서는 약간 정치화된 것이었다면 요즘의 정서는 결이 다르다. 요즘의 대만 젊은세대는 그거는 한국이 그렇게 선택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입장이다.
대만에도 일방적으로 애국주의에 빠져서 한국을 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닌 사람들도 있다. 올림픽 중국 편파판정 기사 댓글에는 ‘중국인인 게 창피하다’, ‘저렇게까지 조급하게 막 해서 과연 중국한테 도움이 될까’라는 걱정들을 오히려 많이 한다.
민진당 정부는 중국에 대한 지나친 경제적 종속이 정치적 공간을 제약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지만 국민들의 생각은 또 다를 수 있다. 중국 관료들이 겉으로는 미국 욕하면서 자녀들을 전부 미국에 유학 보내듯 대만도 중국 욕하면서 비즈니스는 전부 중국에 가서 한다. 이렇게 얽히고 설켜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마디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이번 올림픽으로 인한 반중정서는 중국의 조급성이 드러났다고 본다. 중국이 자기의 의도에 맞게 자기 투자를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려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꿈만 강조하는게 문제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지속적으로 반중 흐름들이 더 강화돼서 오히려 올림픽을 통해서 미국의 올림픽 보이콧을 뚫고 성공한 세계국가의 모습을 보이려고 했던 목표와는 달리 국제적으로 중국의 패권 속성만 비춰지는 이상한 올림픽이 될 수도 있다.
Q. 대만과 일본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고 협력적인데 한국과는 갈등적인 모습이 더 많은 것은 왜일까?
A.
대만은 과거 중국에서는 버려진 땅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대만을 통치하면서 대만을 개발해주었다고 여기는 대만 사람들이 현재도 많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표적 사례이다. 일본도 결국 대만을 대동아전쟁의 식량 병참기지로 이용하려는 의도였지만 대만 입장에서는 오히려 대만 개발에 고마워하고, 리덩후이 총통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했다. 대만의 일본 콤플렉스다.
일본 입장에서도 중국과 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조어도)가 사실은 대만에서 한 200km정도로 대만과 훨씬 가까워서 대만과 함께 대중 견제를 하는 데 좋다고 전략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대만의 뿌리인 중화민국이 한국의 임시정부를 지원해줬고 중화민국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던 시절에 신생국 한국을 얼마나 도와줬는데 한국이 이렇게 배신을 하냐’ 는 것이다. 이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한국을 보고, 한국이 발전해 오니까 경쟁자의 입장에서 한국을 바라본다. 따라서 한-대만 관계가 훨씬 경쟁적 관계가 되었고 거기에는 알게 모르게 한중 수교 과정에서 우리가 매끄럽지 못하게 처리한 부분도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항간에는 한국이 미리 귀뜸을 해줬는데도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대만이 모르는 척했다는 말도 나올 정도로 아직 더 알아봐야 할 사항들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과 대만 관계, 한국과 대만 관계는 이런 구조적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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