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한 발상의 전환 - 7․27 휴전협정 57주년에 부쳐
천안함 사건은 57년 휴전 상태의 구조적 위기 결과이다. 경색 국면을 풀기 위해 과거 책임 추궁보다 평화체제 구축과 연계하여 다뤄야 한다. 조건 없는 남북정상회담을 적극 추진하여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주도권을 확보하고, 휴전 상태를 종결하며 새로운 평화시대를 여는 계기로 승화시켜야 한다.
‘6․25’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이래 지금까지 한반도는 ‘평화도, 전쟁도 아닌’ 상태를 지속해왔다. 휴전 상태를 종결짓고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길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천안함 침몰 사건은 남북 간 첨예한 대치 구도 속에서 갈등과 긴장이 반복되어온 구조적인 위기 상황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하겠다. 휴전 상황은 주기적으로 총성이 울려 바짝 긴장이 고조된 뒤 다시 잠복되는 악순환 구조를 배태시켰다. 전쟁을 매듭짓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정한 긴장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를 사랑한다는 우리 민족이 이토록 평화를 외면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끝나지 않은 전쟁, ‘분단평화’의 종언
냉전체제의 종식과 함께 역설적으로 한반도의 ‘분단평화’의 시대도 종언(終焉)을 고했다. 진영 간 체제 보장의 냉전시대가 종식되자, 북한이 체제보장을 위해 개혁․개방을 거부하고 핵보유 전략을 택함으로써 비록 ‘차가운 평화’(冷平和, Cold Peace)이기는 했지만 ‘분단평화’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한 이후 20여 년 동안 북한의 도발적인 생존전략과 핵문제로 인해 한반도는 위기와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북한의 개혁․개방 거부와 핵보유 전략은 북한경제의 피폐화와 회복불능 상태를 초래했고, 그로 인한 북한 체제 전망의 불투명성 자체가 한반도 위기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이 핵 포기를 결단하지 않고서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를 구축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이다. 물론 북한이 쉽사리 핵을 포기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핵문제에 대한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와 호응을 반드시 이끌어내야만 한다.
또한 천안함 사태와 같은 참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북한의 모험적 도발 유혹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한미 동맹과 압도적인 전력 우위로 대북 압박 전략을 구사하는 방안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다. 평화는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우리 정부는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 이후 여러 차례의 정부 교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평화 구축과 남북한 화해․협력’의 두 축을 중심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해왔으며, ‘선 평화, 후 통일’의 기조를 유지해왔다. 물론 그 동안의 대북정책이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성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북한의 내부 사정과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 태도에 기인하지만, 남북관계에서 우리 정부의 전략적 인내의 부족과 정책적 일관성의 부재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이제는 지금까지의 대북정책을 총 점검한 토대 위에서 휴전 상태를 종결짓고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의지를 새롭게 다져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전략도 정책의 우선순위도 그에 맞추어 집중하고 선택해야 한다.
‘협상을 위한 협상’도 평화의 한 과정
지난해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및 핵실험 그리고 올해 천안함 침몰 사태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논의 분위기는 얼어붙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북한의 주장은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방식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6자회담 재개 문제에 감정적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해 우리는 ‘상향식’(bottom up)접근을 추구해왔다. 평화의 상향식 접근 방식은 쌍방 간 정치적․군사적 신뢰구축과 합의의 실천을 통한 실질적 평화의 축적 과정을 중시한다. 이는 ‘남북기본합의서’ 합의 사항에 잘 나타나 있다. ‘남북불가침’ 조항에서 남북 간의 의견 대립과 분쟁 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규정하였고, 단계적 군축 실현문제, 검증문제 등 군사적 신뢰조성과 군축 실현의 협의․추진에도 합의하였다. 이와 함께 남북경협과 인적․물적 교류 증대를 통해 한반도 평화 구축을 도모해왔다. 이처럼 우리는 상호 신뢰를 토대로 ‘작은 평화’의 성과를 하나씩 하나씩 축적하면서 ‘큰 평화’로 나아가는 상향식 접근을 중시해왔다.
반면, 북한은 '하향식'(top down) 접근을 주장하여, 정치적 일괄타결 방식을 강조해왔다. 북한은 체제보장을 위한 정치적 타결을 주장하면서, ‘작은 평화’는 무의미하며 평화협정부터 체결하자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북한은 북․미 간 핵군축 협상 주장을 통해 핵보유국의 위상을 공식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이는 ‘선 평화협정, 후 비핵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평화체제는 안보 문제를 다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긴장과 갈등 요인을 해소하는 평화 구축의 절차, 규범, 제도를 마련해 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북 간 평화체제에 대한 접근방식의 근본적인 차이를 좁혀가면서 접점을 찾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휴전 상황에서 전쟁 대비도 아니고 적극적인 평화 추구 상태도 아닌 불명확한 현실 인식이 문제이다. 이제는 평화문제에 대한 현실적 인식과 더불어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는 명확한 전략적 목표를 수립해야 한다.
우선 한반도 평화에 대한 ‘눈높이를 낮춘’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평화체제를 평화 구축의 길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적 절차’로 이해하고, 평화체제 논의를 한반도 평화를 향한 긴 여정의 출발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평화협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고 해서 북한 핵문제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고 알맹이가 채워지지 않은 채 단번에 협정문만 도출될 수도 없다. 그러나 휴전협정의 직접적 당사자 간에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과정 자체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지금은 ‘협상을 위한 협상’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협상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가 요구된다.
평화의 제도화를 위해 6자회담 적극 활용을
6자회담은 북한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이러한 6자회담은 동북아 지역의 안보 커뮤니티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한편, 협력적 안보 커뮤니티의 약속은 북한에게 더 나은 미래 전망을 제공할 수 있다. 나아가 6자회담은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지원하고 보장하는 제도적 틀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는 6자회담을 궁극적으로 한민족의 의지와 합의에 의한 통일을 지지하고 존중하는 평화협력의 메커니즘(mechanism)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6자회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미국도 조만간 북한 비핵화를 위해 6자회담 재개를 추진할 것이다. 최근 북한이 대미 유화적 태도를 보이는데도 미국이 강경한 언어를 구사하며 대북 압박을 늦추지 않는 것은 앞으로 북․미 양자회담이나 6자회담에서 보다 유리한 협상 고지를 확보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천안함 사태로 인한 한반도 주변국들의 이해타산이 거의 끝나가면서, 6자회담과 천안함 사태를 별개로 접근하려는 6자회담 참가국의 입장을 계속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비핵화는 양보될 수 없는 원칙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의 개최에 조건을 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물론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표명할 것을 요구할 수 있겠으나 비핵화 의지의 입증은 쉽지 않다. 6자회담은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다자간 협력체제로, 북한이 6자회담 재개를 수용한다면 그것은 비핵화 원칙을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북한 비핵화는 끈질긴 협상과 인내를 요구하는 과제이며, 6자회담이 재개된다 해도 합의 도출에 대한 성급한 기대는 금물이다.
한편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 유지를 강조하면서, 분쟁회피를 위한 직접 대화와 협상을 권장하였다. 의장성명은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9항)고 하면서, “정전협정의 완전한 준수를 촉구하고, 분쟁을 회피하고 상황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적절한 경로를 통해 직접 대화와 협상을 가급적 조속히 재개하기 위해 평화적 수단으로 한반도의 현안들을 해결할 것을 권장한다.”(10항)고 했다.
우리는 천안함 사태에 대해 국제사회와 행동을 같이 해야 한다. 또한 천안함 사태를 유엔 안보리에 공식 회부한 우리 정부는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의 권고 사항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직접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유엔 안보리 조치를 존중함으로써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한 대북제재의 정당성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태는 끝나지 않은 전쟁, 휴전 상태의 한계를 반증한다. 북한은 이미 1990년대 초반 정전상태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정전상태의 무실화로 평화 상태가 도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적으로는 전쟁 상태로 되돌아간 셈이다. 참된 평화 상태를 위해 남북 간 적대관계를 실질적으로 종결짓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대북정책의 목표는 ‘분단의 평화적 관리’를 넘어, ‘분단 극복과 통일’ 추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분단 지속의 평화가 아니라 평화적 통일이기 때문이다.
발상의 전환으로 평화를!
천안함 사태로 야기된 남북관계의 경색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우선 더 이상 남북관계를 악화시키는 조치를 자제해야 한다. 천안함 사건은 과거지향적인 책임 추궁에 집착해서는 해결 방향이 잡히지 않는다. 평화체제 구축의 미래지향적인 방향과 연계하여 다룰 필요가 있다. 조건 없는 남북정상회담을 적극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대북정책의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은 긴장 상태의 남북관계를 한 순간에 타개할 뿐만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의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 일괄 타결 방식)’ 구상을 현실화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천안함의 비극을 57년 동안의 휴전상태를 종결짓고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시대를 여는 계기로 승화시키는 것이 희생된 46명의 장병에 대한 진정한 추모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발상의 전환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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