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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ace Foundation 평화재단

현안진단 29호

북․중동맹 50주년,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조회
3
등록일
2011-07-19

북․중동맹 50주년,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2011년 북중 동맹조약 50주년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은 한반도 정세의 주요 변곡점이다. 군사적 자동개입 조항이 핵심인 북중 동맹 복원 움직임은 안보와 경제 양면에서 미·중 협력이 심화된 한국에 중대한 도전이다. 한국은 이 딜레마를 극복하고, 평창 동계올림픽을 한반도에서 협력적 질서를 만들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 북중동맹 강화를 방임하지 말고 평화와 안정의 한반도 질서 정착을 위해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냉전의 구조화가 가져온 혈맹관계 

 

  2011년 7월 한반도 관련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주목하게 된다. 하나는 북한과 중국이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이하 동맹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창이 세 번째 도전한 결과 오는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것이다. 얼핏 보면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지만, 이 두 가지는 현재의 얼어붙은 한반도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할지 숙고하게 만드는 모티브를 던져주고 있다.

 

  주지하듯이 북한과 중국은 1961년 7월 11일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모택동 주석이 전권대표로 임명한 중국 국무원 총리 주은래와 북한 내각 수상 김일성이 베이징에서 만나 전문과 7개조로 구성된 동맹조약에 합의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조항은 양국 간 군사협력을 담은 2조이다. 이 2조에는 ‘조약 일방에 대한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쌍방이 모든 조치를 공동으로 취하고 조약 일방이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였을 때는 타방은 모든 힘을 다해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소위 군사적 자동개입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동맹조약은 쌍방의 합의가 없는 한 수정되거나 폐기될 수 없다. 그만큼 북한과 중국은 서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과 중국의 동맹관계는 시기에 따라 성격이나 역할이 변해왔다. 냉전 시기 북‧중 동맹은 미국 중심의 반공포위망에 대한 양국의 협력적 대응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 바탕에는 중국공산당의 내전 승리를 위한 북한의 지원과 한국전쟁 시기 중국의 군사적 지원을 통해 형성된 혈맹관계가 깔려 있다. 

 

  1961년 북한과 중국의 동맹조약 체결은 동서 냉전이 동아시아에서 구조화되는 과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당시 북한과 중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 대만, 필리핀 등으로 이어지는 반공포위망이 완성, 강화되자 이에 대항해 역량을 결집하였다.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 1954년 9월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1977년 해체) 출범, 1954년 12월 미․대만 상호방위조약, 1960년 6월 개정된 미․일 신안보조약(1953년 9월 미․일 안전보장조약 개정) 체결 등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북한, 소련을 가상 적으로 삼은 반공포위망의 대표적 사례이다. 북한이 더욱 다급한 측면이 있었겠지만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에 있었던 중국으로서도 북한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사회주의권 내에서 발생한 중․소분쟁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소련의 ‘수정주의’에 대항한 북한과 중국의 밀착이 그것이다. 1956년 8월 종파 사건에서 중국이 북한 내정에 개입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음에도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과의 동맹관계 정립을 모색한 것은 소련 흐루시초프의 탈스탈린화 압력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물론 북한은 중국과의 협력을 중심에 두면서도 중․소분쟁을 이용해 소련으로부터 경제적․군사적 원조 또한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는 중국과 조약을 체결하기 5일 전에 소련과 동맹조약을 맺은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중국과 맺은 동맹조약은 소련과의 그것보다 훨씬 더 공고한 성격을 보여주었다. 일례로 소련과의 조약은 10년 후 5년마다 갱신토록 되어 있었으나, 중국과의 조약은 쌍방이 합의하지 않는 한 영구적인 효력을 갖게 되어 있었고 지금도 이는 변하지 않고 있다. 

 

 

  북․중관계 변화의 함수 

 

  탈냉전기에는 반공포위망에 대한 상호협력적 대응이라는 동맹의 기반 자체가 변하였다. 중국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추진된 개혁개방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 표방과 공산당 지배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시장경제를 핵심으로 한 체제변화를 추진한 데다 1979년 미국과 수교한 후 양국 관계를 협력적 의존관계로 전환해왔다. 특히 1992년 한‧중 수교는 이념에 기초한 북․중동맹의 효용을 크게 감소시켰다.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과의 적대적 대립에 따른 협력 대상으로서 북한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 반면, 북한이 핵문제 등을 야기하며 중국의 국가목표인 경제성장과 이를 위한 안정적 환경조성에 역행한다고 보았다. 동유럽 사회주의권 몰락에 따른 국제적 고립과 김일성 주석 사망, ‘고난의 행군’ 등을 거치며 체제존립 위기에 직면하였던 북한의 입장에서 중국은 국제관계의 냉엄한 현실을 느끼게 한 ‘배신자’이자 유사시 정권교체를 강요할 수도 있는 위협세력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탈냉전기 북․중동맹의 기반 변화는 양국 간 교류나 국제적 현안에 대한 대응에서 나타났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후 1990년대 말까지 북한과 중국 간에는 고위급 교류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990년 중반 북한이 전대미문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중국의 대북 식량지원은 충분하지 않았다. 1996년 양국 간 경제기술협조협정이 체결되기는 하였으나, 양국 간 고위급 교류는 1999년 6월 북한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하고 그해 10월 중국의 탕자쉬안 외교부장이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비로소 재개되었다. 

 

  2000년대 들어 양국 정상이 상호방문하고 교류협력이 확대되면서 관계가 회복되는 모습을 나타냈지만, 이는 이념과 상호 군사적 협력에 기초했던 혈맹관계보다 실리를 중심으로 한 일반적 국가관계의 성격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양국 정상의 상호방문을 보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5월, 2001년 1월, 2004년 4월, 2006년 1월 4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하였고 중국에서는 2001년 9월 장쩌민 주석, 2005년 10월 후진타오 주석이 각각 북한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회복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북한 핵실험에 대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결의안에 반대하지 않았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 1718호가 신속하게 채택될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2009년 5월 25일 북한의 2차 핵실험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협조하에 이전 제재결의보다 훨씬 강화된 대북제재 결의 1874호가 채택되었다. 

 

 

  무엇이 북․중관계를 심화시키고 있는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후 한반도 정세변화에 따라 중국의 대북정책 기조가 달라지면서 양국 간 동맹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첫째, 북한 내부의 정세 불안정이 커졌다. 200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에 이상이 오고 2009년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되면서 권력 갈등의 가능성이 커졌다. 북한의 경제위기는 여전히 지속되는 가운데 주민들의 잠재적 불만도 누적되어 가고 있다. 북한 정권과 체제의 불안정이 전체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동북아에서 궁극적으로 중국을 핵심 표적으로 한 냉전적 대립구도가 부활하고 있다. 이는 한․미 간의 대북압박 강화와 함께 2010년 발생한 천안함 사건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국 정부는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대북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는 가운데 미국의 항공모함을 서해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 미국과 일본뿐 아니라 과거 냉전 시절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과 일본 간의 군사협력마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명실공히 한․미․일 군사동맹과 협력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 정치적․군사적 측면뿐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중국과 북한 간의 협력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중국은 성장 동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서부대개발에 이어 동북진흥계획을 야심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그것이 성공하려면 북한과의 협력이 더욱 절실히 필요해졌다. 창춘․지린․투먼 경제개발선도구와 요령․연해 경제벨트가 성공하려면 라진항을 통한 동해 진출구가 확보되어야 하고, 서해 지역의 정세안정도 긴요하다. 아울러 부산․서울․평양․신의주․단동․심양으로 이어지는 경제성장과 통합의 축도 필요하다. 중국이 신압록강대교 건설을 추진하면서 1단계 단동․신의주, 2단계 신의주․평양, 3단계 평양․개성으로 이어지는 단계별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북한으로서도 권력세습을 원만하게 추진하면서 정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지원, 2012년 강성대국의 문을 열고 향후 김정은 체제의 기반 구축을 위한 경제협력, 미국과 한국의 대북압박에서 벗어나 대외협력을 확대하기 위한 창구 확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중국과의 협력 필요성을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앞에 있는 적인 미국이나 한국 못지않게 뒤에 있는 중국도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당면한 정치적․경제적․군사적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중국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 결과가 최근 급속하게 강화되고 있는 북․중 간 협력심화와 전통적 혈맹관계의 복원 움직임이다. 2009년 10월 북․중 수교 60주년을 계기로 한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 2010년 5월과 8월, 2011년 5월 김정일 위원장의 연이은 중국 방문, 북․중동맹조약 체결 50주년을 계기로 더욱 활발해지고 있는 양국 간 교류와 협력, 전략적 소통과 관계 긴밀화가 이를 말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움직임 이면에서는 단순히 정치적․군사적 차원을 넘어 공동의 개발과 투자협력이라는 튼튼한 경제적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 6월 초 착공식을 개최한 라선경제무역지대와 위화도‧황금평경제지구 공동개발이 그것이다. 중국은 북한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국의 국가목표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도발적인 문제아를 끌어안기로 한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불안정을 매개로 중국을 결박하고, 당면한 정치적․경제적 위기 탈출의 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대중의존도 심화를 감수하면서 협력관계 확대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이 북한을 상대하지 않는 동안 북․중관계는 이미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발전해 나가고 있다. 

 

  돌아보면 2008년과 2009년은 남북관계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었다. 2008년에는 금강산관광객 총격사망 사건으로 남북교류협력의 상징이자 토대가 무너졌다. 그리고 2009년 북한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한 조의특사단 방문 이후 두만강개발계획에서 전격 탈퇴하게 된다. 북한은 중국과의 협력관계를 확대 발전시키려는 선택을 하기 전에 남한과의 협력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으나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냉전질서 부활로 한국의 안보․경제 딜레마 더욱 커져 

 

  북한과 중국의 전통적 동맹관계의 부활과 전략적 협력관계의 심화발전은 우선 한반도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중대한 도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멀리는 인도에서부터 동남아의 남사군도를 지나 동북아에서는 대만과 센카쿠열도를 거쳐 한반도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과거 한국․미국․일본의 남방 삼각과 북한․중국․러시아의 북방 삼각 간 냉전적 대립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독일이 통일을 이루는 데 냉전 종식과 동독주둔 소련군의 철수, 즉 소련의 동의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반도도 마찬가지이다. 냉전적인 대결구도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통일은 불가능하며 대결이 심화되는 국면이라면 통일도 그만큼 멀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냉전적 대결구도 속에서는 한국의 딜레마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 과거 냉전기에 한미동맹이라는 군사적 안전보장체제와 미국 시장이라는 경제적 안전판에 힘입어 고속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탈냉전기에 한국은 군사적으로 여전히 한미동맹에 의존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깊숙이 빨려들어가고 있다. 중국과의 교역규모가 미국과의 교역규모를 추월한 지 오래되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기형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한국의 딜레마는 북한과 중국의 동맹관계 재구축에 따라 더욱 확대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동북아에서 한국의 딜레마를 완화시켜줄 협력관계보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관계가 심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이 위와 같은 딜레마를 벗어나는 길은 동북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립구도를 완화시키면서 협력적 질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 차원의 협력관계를 공고하게 발전시키는 가운데 안보적 차원에서 대립유발 요인을 억제하면서 상호 교류와 협력을 증진시켜 나가는 지역전략이 필요하다. 그 시작은 최소한 상황관리 차원에서라도 북한문제에 대한 협력적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북한도 대중의존도 심화에 수반되는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이 과거 남한․미국․일본과의 관계개선을 끊임없이 시도했던 배경에는 부상하는 중국의 대국주의가 야기할 위험성에 대한 우려도 있었으며 지금도 그 우려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2018년 평창에서 개최될 동계올림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자체가 한반도에서 협력적 질서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라도 한반도와 주변정세의 안정이 긴요하다. 서해에서 포격전이 벌어지고 휴전선에서 총소리가 울리는데 국제적인 스포츠행사가 원만히 열릴 수 있겠는가? 전두환 정부가 1983년 북한이 아웅산 폭파사건으로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도발을 했음에도 1984년 북한의 수해지원 제의를 수용하여 남북관계를 풀어가면서 소위 ‘88라인’을 가동하여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 이유도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함이었다. 보기에 따라 북한에 발목이 잡힌 형국일 수 있지만, 멀리 보고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에 동의한다면 이는 발목 잡힌 것이 아니라 상황 반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카드를 갖게 된 것이다.

 

  햇볕이 났을 때 건초를 만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더 늦기 전에 남북관계에서전략적인 결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국가발전전략을 짠다면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필수적 조건이다. 그러나 북․중 동맹관계가 과거로 회귀한다면 이에 역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가져올 폐해를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하며, 북․중동맹이 60주년, 70주년을 맞도록 방임해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한반도 주변의 대립과 긴장 고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평화와 안정의 한반도 질서가 조속히 정착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데 지혜를 모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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