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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ace Foundation 평화재단

현안진단 43호

도도한 통일에의 물길을 막을 수는 없다 - 남북기본합의서 발효 20주년에 부쳐 -

조회
5
등록일
2012-02-09

도도한 통일에의 물길을 막을 수는 없다 - 남북기본합의서 발효 20주년에 부쳐 -

• 남북기본합의서 발효 20주년에 부쳐 • 남북기본합의서는 화해·협력 단계의 규범문서 남북기본합의서의 출발점은 우리 측의 '잠정협정' 제안 • 이제 '제2의 남북기본합의서'가 필요하다 • 차기 정부의 목표는 '민족공동체헌장' 채택이 되어야

남북기본합의서는 화해·협력 단계의 규범문서 

 

오는 2월 19일은 「남북기본합의서」가 발효된 지 정확히 20년째 되는 날이다. 돌이켜보면 「남북기본합의서」가 탄생하는 데는 상당한 우여곡절을 거쳐야만 했다. 1989년 2월 남북고위급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을 시작한 지 3년 만의 결실이었다. 남북고위급회담은 여덟 차례의 예비회담을 거친 끝에 1990년 9월 제1차 회담을 시작했고, 1992년 12월 제5차 회담에서 당시 정원식 국무총리와 연형묵 정무원 총리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약칭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이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하였고, 특히 남북 양측의 국호와 서명자의 직책을 처음 명기함으로써 상호 인정과 공존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 합의서는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초당파적으로 합의된 우리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첫 번째 단계인 화해·협력 단계를 규율하는 장전(章典)으로 평가된다. 

 

「남북기본합의서」는 1972년에 체결된 「동서독기본조약」(정식 명칭은 「양 독일관계의 기초에 관한 조약」)을 모델로 한 것이다. 「기본조약」이 동서독 관계를 “정상적인 선린관계”로 규정하여 분단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상대를 정치적 실체로 인정했다는 점은 「기본합의서」와 공통된다. 다만 동서독이 1972년에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1974년에 유엔에 동시가입한 데 비해, 남북한은 1991년에 유엔에 동시가입한 뒤 「기본합의서」를 체결한 점이 차이가 난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측에서는 국무총리의 국회보고, 국무회의 심의, 대통령 재가 등의 절차를 거쳤으며, 북측에서는 중앙인민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연합회의 승인을 거쳐 김일성 주석이 비준하였다. 마침내 1992년 2월 19일 제6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인준한 문본(文本)을 교환함으로써 「기본합의서」가 발효되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출발점은 우리 측의 ‘잠정협정’ 제안 

 

사실 「남북기본합의서」의 토대가 된 것은 1981년 1월 22일 전두환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제안한 ‘남북한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이다. 이 ‘잠정협정’은 통일이 이루어지기 이전까지 상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상호 체제 인정 및 내정 불간섭, ∆현존 정전체제 유지, ∆상호 교류와 협력, ∆쌍방의 현존 조약 존중, ∆서울과 평양에 상주연락대표부 설치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잠정협정’ 제안을 뒷받침하기 위해 1982년 2월 1일 손재식 전 국토통일원 장관이 20개항에 걸친 시범실천사업을 제의하였다. 20개 사업의 내용은 크게 △상호 완전개방, △교류협력, △긴장완화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울-평양 도로연결, 인천-진남포 상호개방, 정규방송 청취 허용, 공동어로구역 설치, 비무장지대 내 각종 군사시설의 완전철거, 군비통제 및 직통전화 개설 등 당시의 남북관계로 볼 때 매우 획기적인 제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많은 대북전문가나 정치인들은 이러한 제의에 대해 전두환 정권이 결여된 정통성을 남북관계로 덮기 위해 획기적인 제안을 내놓은 것으로 분석했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이 집권연장 수단으로 도입한 통일주체국민회의 제도의 판박이인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90.2%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됐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 제안은 통일문제에서 유엔의 간여를 배제하고 민족내부적인 성격을 강화했다는 데 커다란 의의가 있다. 

 

그 뒤 1984년과 1985년의 남북경제회담에서 철도와 도로 연결을 비롯한 남북교류협력 방안이 폭넓게 논의됐으며, 대부분의 내용은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와 교류협력부속합의서에 담겼다. NLL과 관련되어 민감한 주제인 공동어로구역의 설정문제는 15년 만인 2007년에 합의를 보았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우리 정부가 제시한 20대 조치들은 「남북기본합의서」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20년의 세월이 경과한 2000년대에 들어와 선별적이기는 하나 대부분 실현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결국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관계의 개선은 시대와 정파를 뛰어넘는 민족적 과제이며, 민족사는 이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큰 물길을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제2의 남북기본합의서’가 필요하다 

 

「남북기본합의서」 발효 직후, 제1차 북한 핵위기가 불거지는 바람에 남북관계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경색되기 시작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를 이행·실천하기 위한 기구인 남북공동위원회는 구성만 되었지 한 차례 회의도 해보지 못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함께 채택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북한 핵문제로 인해 남북대화의 자리에는 북·미대화가 들어섰다. 미국과 북한은 지리한 협상 끝에 1994년 10월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를 만들어냈다. 이 기본합의에 따라 북한이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가로 관련국들이 46억 달러 상당의 경수로 2기를 지어주기로 하였다. 우리 정부는 회담에 참가하지도 못한 채 30억 달러를 부담하게 되었다. 결국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는 신조어를 남긴 채 남북관계는 「남북기본합의서」 이전으로 되돌아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1998년 6월 정주영 전 현대 회장의 ‘소떼 방북’을 계기로 분단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에게 휴전선이 개방되었고, 이를 계기로 같은 해 11월부터 금강산관광이 시작되는 등 남북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어 남북이 제시한 통일방안의 공통성에 기초해 자주적으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하는 「6·15공동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공동선언을 기초로 남북 간에는 교류·협력이 활성화되고, 이에 따른 군사적 보장조치가 이루어졌다.

 

노무현 정부 들어 2차 북핵문제가 터지면서 남북관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임기 마지막 해에 2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어 「10·4정상선언」이 채택되었다. 이 선언에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남북기본합의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많은 합의사항이 담겼다. 특히 NLL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법을 제시한 것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을 계속 협의해 나가기로 한「남북기본합의서」를 한 차원 높여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발효된 지 20주년이 됐지만, 남북관계는 여전히 냉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9년 1월 30일 북한은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와 관련한 모든 합의사항들”을 무효화하며 남북기본합의서 및 그 부속합의서에 있는 “서해 해상군사경계선에 관한 조항들”을 폐기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특히 천안함 사태 이후 남북관계는 모든 대화채널이 끊어진 채 전면적으로 중단되었고, 우리 정부는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한 북한은 정전협정에 대해서도 그 이행·감시기구들을 일방적으로 가동불능 상태에 둠으로써 사실상 무실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현재 남북한은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아무런 제도적 장치가 없는 상태에 빠져 있다. 그런 점에서 이제부터라도 남북관계를 제도화하는 ‘제2의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차기 정부의 목표는 ‘민족공동체헌장’ 채택이 되어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북한 측은 국방위원회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여 우리 측의 조문 태도를 문제 삼아 현 이명박 정부와는 절대로 대화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지난 2월 2일 북한 당국은 국방위원회 정책국 명의로 ‘공개질문장’을 발표하고, “몇 가지 전제조건에 답을 한다면 즉각적으로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북측이 대화거부를 선언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전제조건’을 붙이긴 했지만 남북대화를 열 수 있다고 운을 띄운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이러한 태도변화가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을 남측에 떠넘기려는 것인지, 선(先)남북대화를 요구하는 미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화의사를 밝힌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배경이야 어떻든 중요한 것은 북한 측이 이명박 정부와는 절대로 대화하지 않겠다는 태도에서 벗어나 ‘조건부’이긴 하나 ‘즉각적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점이다. 이것만 해도 진전이라면 진전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본격적인 남북관계의 진전, 나아가 ‘제2의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드는 일은 내년 2월에 출범할 차기 정부의 몫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독일이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을 맺은 뒤 20년이 채 안 되어 통일을 이루어낸 것과 비교할 때 지난 4년간을 허송세월로 보낸 게 아닌지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제2의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여 평화공존 단계를 심화시키고 남북연합 단계로 들어갈 수 있을지, 더 나아가 통일의 궤도에 진입할지, 아니면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을 살리지 못하고 분단시대를 지속해야 할지는 2013년 2월에 출범할 차기 정부에 달려 있다.

 

차기 정부는 앞으로 5년 동안 남북관계를 개선, 발전시켜 남북연합 단계로 진입시킬 민족사적 의무를 지고 있다. 차기 정부의 4년차 되는 해인 2017년 2월이면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된 지 25년째가 된다. 우리가 「남북기본합의서」를 올바로 구현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북경제공동체를 높은 수준으로까지 발전시켜 화해·협력 단계를 끝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남북연합 단계를 규정하는 기본문서인 ‘민족공동체 헌장’의 논의에 들어가야 한다. 

 

차기 정부에서 ‘민족공동체 헌장’이 채택되어 통일을 향한 물길이 대하(大河)를 이룰 수 있게 되기를 학수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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