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국제질서와 신냉전의 착시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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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영공을 침범한 러시아 드론
지난 9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 러시아가 보낸 것으로 보이는 드론이 폴란드 영공을 침범했으며 확인된 것만 19기에 달한다. 폴란드는 F16 전투기를 출격시켜 4기의 드론을 격추했으며, 나토 동맹국인 네덜란드도 F35를 출격시켰다. 나토 전투기가 회원국 영공에서 적대적 목표물을 공격한 사례는 1949년 나토 창립 이후 처음이라고 알려졌다. 폴란드는 즉각 나토 조약 제4조의 발동을 요청했으며 이는 나토 창립 이후 8번째에 해당한다. 나토 조약 제4조는 영토 보존, 정치적 독립 또는 안보를 위협받은 동맹국이 긴급 협의를 요청할 수 있다는 내용이며, 제5조는 집단적 대응을 규정하고 있다. 13일에는 루마니아 영공에 러시아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드론이 출현해 이에 대한 대응으로 F16이 출격하여 요격에 나섰다.
폴란드 영공을 침범한 드론들의 발진지가 러시아와 벨라루스였다는 점에서 나토는 러시아의 의도적 행위로 의심하고 있다. 러·우전쟁 발발 이후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폴란드 영공에 대규모의 드론이 출현한 것은 처음이며, 일부 드론에는 우크라이나 영공을 벗어난 지역까지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보조연료탱크까지 장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반면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자신들의 행위가 아님을 부인하고 있으며, 12일부터 폴란드와 벨라루스 국경 인근, 발트해 그리고 러시아 역외 영토인 칼리닌그라드 등지에서 연합훈련인 ‘자파드 2025’ 훈련을 시작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자파드 2025’에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참관단을 초청하면서 자신들의 훈련이 위협이 아닌 연례적 성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벨라루스군의 주요 훈련 지역이 폴란드와 발트 3국 등 우크라이나 인접 나토 회원국의 영향권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토와 국제사회 일각에서는 러·우전쟁의 범위가 인접국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러시아가 전쟁을 장기화하거나 전장을 확장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최근 러시아는 확충된 드론 제조 능력을 바탕으로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드론 공세를 퍼붓고 있지만 이를 통해 전세를 장악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러시아가 활용하는 자폭용 드론은 속도가 느려 요격에 취약하고 폭발력에 제한이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 타격 능력에 한계가 있다. 드론에 의존하는 러시아 공습전략의 이면에는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하는 러시아 공군력의 취약성이 있다. 최근 러시아는 오토바이, 버기, 전지형차량(ATV)을 활용하는 전략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는 전차와 장갑차의 대규모 손실로 인한 궁여지책에 가깝다.
늘어나는 국가부채와 부가세 인상까지 고려할 정도의 재정난, 그리고 최근 세 차례의 인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7%에 달하는 고금리 등 러시아에는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로감이 누적되어 있다. 우크라이나의 지속적인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공격으로 석유 부국 러시아의 시민들은 휘발유 부족이라는 역설적 상황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전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역시 전쟁의 장기 지속성에 한계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전쟁 수행 능력의 절반 가까이 외부에 의존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8월 15일 알래스카 미·러 정상회담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은 핵심 쟁점인 영토 문제에 대해,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영토와 돈바스 전체에 대한 양보를 종전의 조건으로 제시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은 9월 4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 참석차 방문한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모스크바 회동을 제안했으며 이는 러·우전쟁 발발 이후 최초다.
올해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러·우전쟁 종식을 위한 흐름이 형성되어 왔다. 한국전쟁의 경험상 휴전 협상은 쉽지 않은 과정이며, 근래에 들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투가 오히려 격화하는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전쟁 수행 능력에 구조적 한계가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러·우전쟁의 복합성을 고려할 때 완전한 종전은 쉽지 않을 것이나, 잠정적 휴전의 가능성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신냉전의 착시와 각자도생의 국제질서
지난 9월 3일 중국 텐안먼 성루에 북·중·러 3국의 정상이 자리를 함께했으며, 이는 1959년 마오쩌둥 중국 주석,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제1서기, 김일성 주석이 텐안먼 성루에 함께 오른 이후 최초의 사례다. 1959년의 경우 김일성 주석과 마오쩌둥 주석 사이에는 저우언라이 중국 국무원 총리, 미하일 수슬로프 소련 외무위원장 그리고 호찌민 베트남 국가주석 등 3명이 있었지만, 이번의 경우 김정은 위원장은 시진핑 주석 왼쪽, 푸틴 대통령은 오른쪽에 자리했다.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 26개국의 정상과 대표단이 참석했지만, 김 위원장의 의전 순서는 푸틴 대통령 다음이었다. 시 주석이 정식 회담을 개최한 대상도 푸틴 대통령과 김 위원장 뿐이다.
중국, 러시아 그리고 북한은 모두 미국 및 서방과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유럽의 강력한 제재에 직면해 있으며, 북한은 핵무기 개발로 인해 유엔안보리의 강력한 제재와 아울러 국제사회로부터 사실상 고립된 상황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중시정책(Pivot to Asia)에서 출발한 미국의 대중국 견제정책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노골적인 중국 고립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북·중·러 3국 모두 미국을 위시한 서방과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이며 협력체제를 구축해야 할 공동의 필요성이 내재해 있다.
중국은 러시아의 첨단 군사기술과 석유 가스 등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러시아는 중국의 제조업 역량이 절실한 상황이다. 러·우전쟁 발발 이후 중국은 러시아에 살상 무기가 아닌 이중용도 성격의 물품을 제공하고 있지만, 이는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 유지에 절대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북·러 간에는 2024년 6월 체결된 신조약을 기반으로 사실상 군사동맹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북한은 러시아에 다량의 군수물자와 병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러시아 역시 북한이 필요로 하는 첨단 군사기술을 이전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중국 전승절 80주년을 계기로 성사된 북·중·러 3국 정상의 텐안먼 성루 회동을 신냉전의 표징으로 평가하는 담론이 힘을 얻는 이유다.
그러나 현재 국제질서와 글로벌 경제구조의 특성을 감안할 때 냉전기의 추억을 소환하는 것이 적절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냉전기의 경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별개의 공급망으로 연계되어 있었으며 이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강력한 진영이 존재했다. 반면 현재 세계는 단일한 공급망(GVC)으로 연계되어 있어 어느 한 국가의 경제 상황은 곧바로 글로벌 공간 전체의 문제로 확산된다. 또한 오늘날 국제사회에는 이념으로 뭉쳐진 강력한 진영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 전승절 80주년에 참석한 국가 중 북한, 중국, 베트남, 라오스, 쿠바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비 사회주의권 국가였다.
이번에 북·중·러 3국의 정상회담도 개최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각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상이하기 때문이다. 중국 열병식을 통해 드러난 인민해방군의 가공할 군사력과 시진핑 주석이 연설에서 강조한 중화민족주의는 경쟁과 협력이 병존하는 중·러관계의 특성상 러시아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북한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도 상이하다. 북·러 밀착과 병행해 북·중관계가 소원해진 점이 이를 반증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은 중국에게는 딜레마다. 북·미관계 개선의 최종 종착지는 북·미 수교이며 이는 중국의 대북 영향력 약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익중심 실용외교’의 도전과 기회
러·우전쟁은 단기전 가능성에 대한 예상을 깨고 발발 이후 3년 반 이상을 경과하고 있지만 전선이 교착된 상황에서 지리한 대규모 소모전을 계속하고 있다. 개전 직후 1년을 제외할 경우 러시아의 전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세를 뒤집을 만한 대공세의 가능성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 모두 높지 않다. 러·우전쟁의 장기화는 양측 이해관계의 차이에 의한 협상의 난항과 아울러 국제사회 분쟁조정 능력의 구조적 제약이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유엔안보리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 중국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사실상 식물상태로 전락해서 그 어떤 주요한 합의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안보리 만장일치제도의 구조적 한계다. 더 큰 문제는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강대국들 모두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국제규범과 관례를 무시한 채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자국 중심의 경제적 이해관계 관철에 몰두하고 있으며, 동맹관계에서도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은 권위주의 연대를 통해 자국의 영향력 강화에 몰두하고 있고, 러·우전쟁으로 고립된 러시아는 국제사회의 규범을 무시하며 자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벌이고 있는 전쟁은 사실상 전쟁범죄와 다를 바 없는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2023년 10월 이후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으로 죽음을 맞이한 팔레스타인 사망자 수는 6만 명을 상회하며, 이 중 80% 이상이 민간인으로 추정된다. 사망자의 다수가 어린이, 여성, 노약자이며 부상자도 3배에 달한다. 하마스에 대한 군사작전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사실상 가자지구에 대한 황폐화 작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자지구 사태는 오늘날 국제사회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제질서의 다극화와 무극화, 그리고 안보적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미국보다 일본을 먼저 방문하는 파격적 행보를 보였으며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재명 정부는 한·미·일 협력체제를 지속시키겠다는 입장이며, 예정대로 을지프리덤 쉴드 훈련과 한·미·일 다영역 훈련을 개최해 이를 행동에 옮겼다. 이는 이재명 식 ‘국익중심 실용외교’의 행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어려운 외교 환경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던 이시바 총리는 사임 의사를 표명했으며 보다 우경화된 인사들이 차기 총리 후보로 나서고 있다. 또한 미국 조지아 한국인 근로자 구금사태는 트럼프 행정부의 민낯과 아울러 좌표 없는 국정운영의 한계를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흔들리는 세계, 불확실성의 국제질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느슨한 진영논리 속 각자도생의 세계를 직시하고 대한민국의 생존과 미래 발전을 고민할 때다. 아울러 불확실성은 언제나 자체로 확실성을 잉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예비하고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안목과 역량도 필요하다. 예상되는 한·미·일 관계의 파고를 넘을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하고, 신냉전의 착시를 넘어 북·중·러의 셈법을 파고들어서 우리의 국익을 관철해 나가야 할 것이다. ‘국익중심 실용외교’의 평가는 구호가 아닌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경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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