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복합 위기의 시대, 이재명 정부의 대외 전략 방향
대한민국의 외교·안보는 한반도와 북한 문제를 넘어 ‘한국형 세계 전략’의 길을 가야 한다. 지속 가능한 평화와 번영, 그리고 국가 발전을 위해 세계와 어떻게 연결하고 나아갈 지의 과제가 새 정부 앞에 놓여 있다. 이에 <현안진단>이 새 정부가 가야 할 대외 전략의 방향성을 살펴보았다.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 기록될 만한 미증유의 비상계엄 사태를 넘어 새 정부가 출범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회복 탄력성이 다시 한번 빛을 발휘했으며, 선거 과정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가 비교적 차분하게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다. 그러나 새 정부는 대내외적으로 산적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우선 갈라진 시민사회의 간극을 좁히고 정치 싸움에 지친 서민경제를 회복하는 일은 한시도 미룰 수 없다.
국익 우선의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새 정부가 당면한 글로벌 안보와 경제의 불확실성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다. 지난해 12월 3일 시작해 올해 6월 3일 대선까지 반년간 우리가 국내 정치의 혼란에 매몰되어 있을 때 지구촌 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돌아온 트럼피즘은 안보와 경제 두 측면에서 동맹과 적을 가리지 않는 자국 우선주의 광풍을 몰아치고 있다. 새 정부는 당장 한·미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미·중 전략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도 과제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에 대한 백악관의 일성은 이례적인 중국 개입 가능성에 대한 경고였으며, 중국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헤그세스 미국 국무장관은 안미경중(安美經中)을 경고하고 나선 상황이다. 중국과의 경제 관계와 한·미 동맹을 실용주의적으로 결합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놓여 있다.
윤석열 정부의 대일 경사 외교를 내심 반긴 일본과의 관계에는 암초가 놓여 있다. 당장 위안부 해법에 대한 시각차가 다시 노정될 개연성이 있으며, 올해 6월부터 일방적 파기가 가능해진 한·일 대륙붕협정의 향배에 따라 한·일 관계가 급격한 변화를 겪을 가능성도 우려된다.
급격하게 밀착하고 있는 북·러 관계에도 불구하고 한·러 관계는 여전히 중요하다. 러·우 전쟁 종식 이후에도 북·러 관계는 상당 기간 지속될 개연성이 있다. 나토와 대립 구도를 설정한 러시아로서는 북한의 군사적 조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한 역시 국제적 고립의 탈피를 위해 러시아와의 밀착 관계가 중요하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을 교훈으로 새 정부의 창의적인 북방공간 활용 정책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와 ‘헤어질 결심’을 확고히 한 북한과의 남북 관계 설정은 난제다. 이 대통령은 대북 전문가를 국정원장으로 임명해 교착상태의 남북 관계를 돌파하겠다는 의사를 암시했으나, 북한의 호응 여부는 불투명하다. 현실화한 북핵 위협에 대한 대응과 남북 관계 재정립 여부는 새 정부 외교·안보 정책 평가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 5위권의 국방력, 그리고 세계를 선도하는 한류를 기반으로 대한민국은 외교·안보, 경제, 그리고 문화의 영역에서 이미 글로벌 공간의 주요 행위자로 기능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의 외교·안보는 한반도와 북한 문제의 프리즘을 넘어 ‘한국형 세계 전략’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지속 가능한 평화와 번영, 그리고 국가 발전을 위해 한반도와 글로벌 공간을 어떻게 연결하고 활용할지의 과제가 새 정부 앞에 놓여 있다. 이에 <현안진단>이 주요국을 대상으로 새 정부가 가야 할 대외 전략의 방향성을 살펴보았다.
국익 중심 실용 외교의 근간과 방향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국제정세는 커다란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국에 대한 방위비 증액 압박과 무차별적인 관세정책은 정치, 경제, 그리고 국제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와 영역에 걸쳐 기존 질서의 급격한 재편을 추동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 유럽연합은 치열한 세력 경쟁을 펼치면서도 상황과 쟁점에 따라 협조가 동반되는 강대국 외교 정치를 구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다른 국가들은 약소국 이익의 희생을 요구하는 거센 파고에 대비하여, 전략적 자율성을 중시하면서도 강대국들의 상호 경쟁을 활용하여 국익을 증진하기 위한 탄력적이면서 실용적인 외교 안보 정책을 꾀하고 있다. 강대국의 시대와 전략적 자율성을 중시하는 자강의 시대가 중첩되고 병존하는 국제정세에서 국익을 중시하는 실용주의 외교는, 국제정세의 시대적 흐름에 부합할 뿐 아니라 한국이 직면한 대내외적 도전에 맞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대외정책 기조에 적합하다.
이재명 대통령도 취임 연설에서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통해 글로벌 경제·안보 환경 대전환의 위기를 국익 극대화의 기회로 만들고, 굳건한 한·미동맹을 토대로 한·미·일 협력을 다지고, 주변국 관계도 국익과 실용의 관점에서 접근하겠다”는 점을 피력했다. 현실의 국제정치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제시한 국익 중심 실용 외교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효용성을 최적화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중시해야 한다.
한반도와 동북아 주변 지역에서 전개되는 미국과 중국의 치열한 각축에서 우리의 외교 안보 정책의 초점과 무게중심은 미국이냐 중국이냐, 전략적 모호성, 혹은 전략적 명확성의 문제가 아니라 강대국 관계와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자강 부분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에 있어야 한다. 즉, 국익 중심 실용 외교의 핵심적 관건은 강대국과 자강의 요소를 어떤 비율로 어떻게 배합할 것인가라는 전략적 과제다.
이러한 전략적 고민과 판단은 이재명 정부의 안보·동맹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다. 굳건한 한·미동맹이 외교의 기본 축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역대 정부가 습관처럼 해왔던 단순한 군사력 위주의 안보력이나 동맹 강화가 아니라 평화와 안보의 선순환 관계 형성과 동맹의 정책 협의 기능을 확대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안보 자율성을 늘리고 동맹의 호혜성을 키워 전략적 자율성과 자강력을 키워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다져야 한다. 참고로 동맹의 호혜성은 한·미 양국의 고유한 국익을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상황에 따른 동맹이익의 영역과 종류에 대한 활발한 협의를 통해 호혜적이고 건강한 동맹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강대국 정치와 자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현재의 국제정세에서 주권자인 국민의 바람과 의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이를 국가 의지로 표출시키는 국익 중심 실용 외교는 ‘진짜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거센 외풍을 막아낼 수 있는 외교와 안보, 그리고 동맹 정책의 튼튼한 초석이 되어야 한다.
대미 정책: 미래형 포괄적 전략동맹 추구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출범 이후 ‘미국 우선 대외정책 2.0’을 재활성화하여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이익을 공세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동맹 및 가치 외교를 중시했던 전임 바이든 행정부와 달리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동맹과 파트너십 여부에 상관없이 관계 개선 및 협력 증대를 도모하고 관세를 부과하여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를 줄이려는 일방적인 움직임은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다. 미국 발 불확실성은 대미 관계가 대외정책의 핵심을 차지하는 한국에 중대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불법 계엄으로 훼손된 한·미동맹의 신뢰 기반을 복원하고 미래형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발전시킬 것임을 밝혔으며, 굳건한 한·미동맹 토대 위에서 실용 외교를 펼칠 것임을 천명하였다. 북한 핵·미사일 능력의 고도화 및 재래식 전력의 향상으로 인해 한반도 안보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 정부는 한반도 안보의 균형자로서 한·미동맹의 역할에 우선순위를 지속적으로 부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한·미동맹이 한반도의 안보를 위한 군사동맹으로서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미국과의 소통 및 협력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우리 정부는 상호 신뢰와 존중을 토대로 서로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미 양국 간 협력을 증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위해 한반도를 뛰어넘어 지역 차원의 협력을 선도하는 핵심 기제로 한·미동맹을 발전시킴으로써 미래형 포괄적 전략동맹으로서의 모습을 구체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한·미 양국 간 외교·안보 및 경제·통상 분야 현안을 호혜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출범 초기 이재명 정부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할 주요 의제라 하겠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주한미군 감축과 재배치 및 한국의 적극적인 역할과 기여 요청 가능성에 대비하여 우리의 입장을 정하고 대응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우리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위한 협상 카드로 사용할 가능성, ▲주한미군 일부 감축 가능성, ▲주한미군 철수 및 재배치 가능성 등을 구체화시켜 나갈 경우를 포함하여 모든 옵션에 대한 대응 방안을 치밀하게 마련해야 할 것이다.
우리 기업과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미 양국 간 관세 협의에 대해서는 다소 긴 호흡으로 보다 확실한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요구된다. 우리 정부는 미 측에 정권 교체에 따른 협상팀 교체 및 준비 기간 연장 등에 대한 양해를 구한 후 우리의 국익에 부합하는 대응 전략 및 방안을 충실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대중 정책: 관계 개선의 모멘텀 유지
한국 대선 이후 중국 내에서 한·중 관계 회복에 대한 기대가 나타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기간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의 성숙한 발전 지속’을 공언한 만큼 한국 새 정부가 미·중 간 균형 외교를 재추진하고 한·중 관계의 회복을 모색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그러나 트럼프 2기 들어 미·중 전략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한국이 직면한 선택의 딜레마는 더욱 커졌고, 북·러 군사 밀착과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한·중 간 입장차로 한반도 안보 환경은 불안정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외교안보 분야에서 한·중 간의 이견과 갈등이 표출될 가능성이 높다. 새 정부는 한·중 관계의 급격한 개선을 추진하기보다 외교안보 이슈에 대한 한·중 양국의 입장차를 인식하고 관리함으로써 한·중 관계 개선의 모멘텀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새 정부는 우선적으로 중국과의 소통을 활성화해 한·중 양국의 입장차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중 정책을 설계해 나가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인도태평양 지역 내에서 대중국 견제를 강화하기 위해 동맹들의 역할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새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와 협상해 나갈 때, 대만 문제 등 대중 견제와 관련된 논의도 불거져 나올 것이다. 한국 내 정치 양극화와 안보 불안 등으로 새 정부는 굳건한 한·미동맹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이 중국의 실망과 한국에 대한 외교적 회유와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중국이 북핵 문제에서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고 남북 관계 개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한국 내에서 대중 불신이 형성되고 한·중 관계의 발전을 모색하는 새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형성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새 정부는 한·중 양국의 입장차를 정확히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는 이슈 중심으로 한·중 협력을 추진해나가야 한다.
새 정부는 우선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한·중 양국의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과거 북핵 문제 접근에 있어서 중국 정부와 한국 진보 정부는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다. 한국의 ‘한반도 평화체제’, 중국의 ‘쌍잠정(雙暫停: 한·미연합훈련과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과 ‘쌍궤병행(雙軌竝行:북한 비핵화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 동시 논의)’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미·일 안보협력이 추진되면서 중국은 쌍잠정이나 쌍궤병행을 언급하기보다 핵미사일 개발이 ‘자위적 핵 억제력’이라는 북한의 주장을 답습하고 있다. 한·미·일 안보협력 등 미국 주도의 안보협력이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겨냥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새 정부는 북핵 문제가 지역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한·중 협력을 저해한다고 강조하며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중국의 공감대를 이끌어내야 한다.
새 정부는 다양한 분야에서 한·중 협력의 성과를 적극 홍보하며 한·중 관계 개선의 메시지를 대내외에 전달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으로 글로벌 경제가 불안정해지는 상황에서 한·중 경제협력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에 이어 한국도 중국 단체관광객에 대한 무비자 정책을 시행하면 한·중 인적 교류가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이를 계기로 경제 통상, 문화 행사 등 다양한 부분에서 한·중이 협력할 수 있는 사안을 발굴하고 소기의 성과라도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한다. 이는 미·중 전략경쟁, 북핵 위협, 대만 문제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한·중 협력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 한·중 양국 국민 간의 상호 감정을 개선하고 장기적인 한·중 관계 발전의 토대를 쌓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대일 정책: 일관성에 입각한 실용적 해법의 모색
한·일 관계에서는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 엉켜버린 과거사 현안의 해법 찾기가 당면 과제다. 그러나 인적교류 1,200만 명 시대를 맞이하여 양국 국민 사이에서 정착되고 있는 우호적인 기류를 이어가는 노력도 중요하다. 미국 주도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동요하면서 다극화 경향을 보이고 있고, 미국 발 관세 전쟁으로 새로운 질서 구축의 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일본과의 협력이 다가오는 위기 대응을 위해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반도 화해 협력을 위해서도 한·일 관계 관리가 중요하다는 점은 이미 문재인 정부 시기에 확인된 바 있다.
한·일 관계에서 식민지 지배에 기인하는 피해를 제대로 기억하고 피해자들을 정의로운 해결에 입각해 온전히 구제하는 일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구체적으로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이다.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는 일본 기업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방식의 ‘제3자 대위변제’ 해법으로 강제동원 문제를 풀려 했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고 유효했다는 일본의 주장에 우리가 동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뉴라이트 인사들의 전면 배치가 그 결과였다. 그 연장에 한·일 준동맹화 움직임이 있었다. 12.3 계엄 선포와 내란 시도가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이러한 움직임은 한·일 수교 6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제도화 수순을 밟고 있었을 것이다.
극적인 정권 교체가 한·일 수교 60년, 해방 80년, 을사늑약 120년의 해에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온전히 극복하는 것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이를 외면하는 정치가 사라지는 것이 필연의 전개임을 보여주는 사실들이다. 그러나 이는 간단하지 않은 과제이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새 정부는 일본에 대해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극복하는 일이 양국의 과제로 남아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긴 호흡으로 일본에 다가서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새 정부의 목표는 60년 전에 맺어진 한·일 기본조약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다. 특히 식민지 지배의 무효를 둘러싸고 해석 차를 빚어 온 제2조가 문제다. 이제 과거사 현안을 둘러싼 갈등의 근원을 해소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양국 사이의 협력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이미 참가하기로 결정된 G7 등, 일본의 이시바 수상을 만날 기회가 촘촘한 것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해서는 ‘제3자 대위변제’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해결의 수위를 높여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 그 기원이 되었던 ‘문희상 법안’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 해법과 ‘문희상 법안’의 가장 큰 차이는 일본의 정부와 기업의 참여를 확인하는 일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는 데 니시마츠 건설의 시도를 접목해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와 화해를 이룬 방법이다. 이를 국회 논의를 거쳐 법제화한다면, 국민적 신뢰 위에서 해결될 가능성이 열린다. 이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정의로운 해결의 길로 다시 들어설 수 있다. 그 출발점은 2015년 한·일 외교장관의 구두 합의가 정부 간 합의로 존재한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과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입장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외교의 공간을 창출하는 일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국가 간 관계에서의 일관성과 실용적 관점을 거듭 강조하고, 취임사에서도 이를 재확인한 것은 일단 일본 측에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긴 호흡으로 오랜 숙제를 풀기 위해서는 흉금을 터놓고 마주 대할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마침 일본의 이시바 내각은 대화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그 가능성에 기대를 품고 있다. 7월 참의원 선거를 치르고 나면 이시바 수상이 본격적으로 한·일 관계에 시동을 걸 수 있게 된다. 8월 말에는 일·한의원연맹의 방한이 예정돼 있기도 하다. 그 어느 해보다도 역사적 의미와 무게를 지니게 될 8.15 경축사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대러 정책: 북방공간 관리
러·우 전쟁이 조기 종전의 예상을 넘어 3년 4개월을 경과하고 있다. 러시아는 남한 규모에 해당하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1/5가량을 점령하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전선에서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나토의 지원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달리 러시아는 사실상 고립 상태에 놓여 있으며, 미국에 대응해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중국도 러시아에 살상 무기를 제공하고 있지 않다. 사실상 북한만 유일하게 러시아에 병력과 무기 및 탄약을 제공하고 있다.
러시아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 경제는 3.6% 성장했지만 3/4분기 인플레이션은 12%를 넘었으며, 중앙은행 금리는 21% 수준이다. 국가 예산의 40%가량이 국방비이며, 총생산의 10%가량이 국방과 관련되어 있다. 전시경제의 한계다. 사실상 외부의 지원에 의존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어려움은 더하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전략폭격기 상당수를 파괴하고 러시아가 무차별 폭격으로 대응하는 등 러·우 전쟁이 격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양측 전쟁 수행 능력의 한계를 감안할 경우 결국 휴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종전의 경우 영토 분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여부 등 다양한 난제들이 산적해 있어서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으로 러·우 전쟁은 한반도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중조기경보통제기, 공대공 미사일, 그리고 신형 구축함 등 북한은 자체 기술로 제작이 어려운 무기체계를 선보이고 있으며, 러시아의 기술 이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다.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이 재래식 전력을 현대화할 경우 우리 안보에 직접적 위협으로 작용한다. 북·러 간 군사협력이 레드라인을 상회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은 이재명 정부의 대러 정책에서 우선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남북 경협에 대해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 왔으며, 이는 푸틴 대통령의 신동방정책과 관련이 있다. 신동방정책은 시베리아·극동의 지하자원, 시베리아횡단철도(TSR), 그리고 북극항로 등을 활용해 동방에서 러시아의 미래를 찾고자 하는 푸틴 정권의 핵심 정책이다. 러·우 전쟁으로 서방과의 관계 악화가 불가피한 푸틴 정권으로서 향후 신동방정책을 보다 중시할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정부가 중장기적 관점에서 러·우 전쟁 이후 북방공간을 관리하는 새로운 북방 정책을 도모해야 하는 이유다.
남동부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영토의 1/5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가 이를 반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에서 러·우 전쟁 이후 러시아는 대규모 전후 복구의 과제를 안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전후 복구는 한국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살상 무기를 지원한 미국 및 유럽과 달리 한·러 관계 회복의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전후 러시아의 수요를 활용하는 실용적 대러 정책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은 한국의 발전에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정책 등 냉전체제 해체 이후 북방공간은 국가 발전의 기회의 창이었다는 점을 이재명 정부의 실용 외교가 직시해야 할 것이다.
대북 정책: 실용주의에 기반한 남북 관계 정립
남북 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현상적으로는 북한이 2023년 말 적대적 2개 국가를 주장한 것에 기인하지만, 실질적으로는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사실상 단절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북한은 2024년 헌법에 적대적 2개 국가론을 명문화하고, 모든 대화 채널을 차단했으며, 남조선이라는 민족 내부 관계의 표현 대신 한국 또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명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는 북한 봉쇄와 압박에 주력했으며, 북한의 핵개발 고도화에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북한은 러·우 전쟁 파병 등 북한판 신냉전 외교를 강화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군사력 제고에 집중하고 있다.
한반도 상황은 1990년대 남북기본합의서 이전으로 회귀했고, 남북 간의 군사적 대치는 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3조와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규정한 헌법 4조는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6월 4일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대북정책에서도 실용주의 노선을 천명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선서에서 “아무리 비싼 평화도 전쟁보다 낫습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낫고, 싸울 필요 없는 평화가 가장 확실한 안보입니다. 북한 GDP의 2배에 달하는 국방비와 세계 5위 군사력에, 한·미군사동맹에 기반한 강력한 억지력으로 북핵과 군사도발에 대비하되, 북한과의 소통 창구를 열고 대화 협력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겠습니다”라고 대북정책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대북정책에도 실용주의 노선을 취할 것임을 예고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설계자와 실행자들을 대북정책의 핵심에 두는 인사를 했으며, 평화를 지향한다는 이재명 정부의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의 반응이다. 이미 ‘헤어질 결심’을 한 북한의 생각을 바꾸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단절된 대화 채널을 복원하고 군사적 신뢰를 구축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비정부 기구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위한 기능을 살려야 한다. 북한이 대미, 대일 관계 개선을 시도할 경우 중장기적 관점에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라는 큰 틀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실용주의 관점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협력을 견인하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포괄적 단계별 해결책을 제시하는 한국의 대응 방안을 명확히 하는 한편, 북·미 협상 재개가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도록 견인해야 할 것이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이 동참하는 다자간 협의 채널의 병행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민생분야와 직결되는 대북 제재를 완화하는 조치도 필요하다. 헌법을 준수하고,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 체제를 기본으로 한반도 평화를 최우선 하는 ‘실용적인 대북정책’을 기대해 본다.
흔들리지 않는 국익 우선의 좌표를 설정할 때
탈냉전기 질서 재편의 혼돈 속에 미·중 전략경쟁은 이미 상수이며,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으로 유럽의 안보 상황은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후티 반군의 활동은 주요 무역 항로에 제약을 가하고 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투는 국제 무기의 전시장과 다를 바 없었다. 미국 발 관세 전쟁으로 보호무역주의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으며, 교황 레오 14세가 민족주의의 과잉을 걱정할 정도로 지구촌 사회는 우경화하고 있다. 적대적 2국가론을 확고히 한 김정은 정권의 마음을 돌리는 일도 쉬운 과제가 아니며, 북·미 대화가 재개된다 해도 ‘한반도 운전자론’은 이미 과거의 추억일 뿐이다.
맹위를 떨치고 있는 트럼피즘이 입증하고 있듯이 현재는 냉전기와 같은 강력한 진영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념도 더 이상 국가 관계를 강화하는 시멘트가 아니다. 느슨한 진영 논리 속 각자도생의 시대다. 경제와 안보가 중첩되는 글로벌 불확실성의 시대, 변화된 한반도 안보와 통일 환경 속에서 새 정부는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내세우고 있다. 냉혹한 한반도·글로벌 정세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실용 외교의 길을 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국익이라는 명확한 좌표다.
비상계엄 사태에서 조기 대선이 치러지기까지 지난 6개월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는 국내 정치에 매몰되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새 정부의 기민한 대외정책의 구사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새 정부가 약속한 ‘진짜 대한민국’의 완성은 실용 외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실용 외교의 가장 중요한 평가의 기준은 결국 성과의 도출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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