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 후 외교 재균형화가 시급하다
가치외교의 깃발 아래, 비정상적으로 한・미・일 3각 안보협력에 올인하여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관계 개선에 집착하는 바람에 한・일 간 역사 화해와 남북 간 긴장 완화, 중국 및 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관계 관리에 소홀했던 외교를 실리외교의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시급해진 외교 재균형화의 과제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대통령 윤석열이 파면되었다. 명분 없는 위헌 위법적 비상계엄 발표로 대한민국을 온통 혼돈의 시간으로 빠뜨린 지 4개월 만의 일이었다. 내란 동조 세력이 요소요소에 버티고 있어 매우 더디게 진행되지만, 이제야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을 맞이했다.
일상의 회복을 위해 풀어야 할 국내적 과제가 산적해 있는 가운데, 외교의 재균형화(rebalancing)도 시급한 과제다. 가치외교의 깃발 아래, 비정상적으로 한・미・일 3각 안보협력에 올인하여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관계 개선에 집착하는 바람에 한・일 간 역사 화해와 남북 간 긴장 완화, 중국 및 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관계 관리에 소홀했던 외교를 실리외교의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발 안보 구상 - ‘하나의 전장(戰場)’ 구상
그동안 한・미・일 돌출외교의 전제가 되었던 국제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이미 조짐이 보였던 다극화 경향이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한 관세 전쟁을 배경으로 가속화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하나의 전장(One Theater)’ 개념을 들고 나와 미국의 관세 압박에 대응하고 있다. 지난 3월 30일, 나카타니 겐(中谷元) 일본 방위상이 도쿄를 방문한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과의 회담 자리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한반도와 동중국해, 남중국해를 하나의 전장으로 묶어, 이 지역에서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동지국(同志國, like-minded countries)들과의 방위협력을 강화시켜 나간다는 구상이다. 구체적으로는 호주와 필리핀, 그리고 윤석열 정부 이후 동지국 취급을 받게 된 한국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의 전장’ 구상이 마침 “일본이 서태평양에서 자체 방위, 집단 방위에 훨씬 더 적극적이고 확대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콜비 미 국방부 정책차관의 발언이 나온 뒤에 제시되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정말로 그러한 각오가 되어 있는지, 능력을 갖추었는지 여부와 별도로, 이러한 구상이 정책으로 채택되어 현실화되면 미국과 중국에 더해, 러시아와 인도 등으로 구성되는 지역패권 국가 대열에 일본이 끼어드는 결과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이는 아베 전 수상이 인도태평양 전략 개념을 들고 나온 이래 일본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정학적 사고’의 도달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가 포함된 전략개념을 일본이 들고 나와, 미국이 이에 동조하고 있는 게 현실인데, 우리 정부의 목소리나 존재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이게 한·일관계 개선에 올인한 결과이고, 캠프데이비드 합의의 제도화가 지향하는 방향이라면, 시급히 손익계산서를 다시 작성하여 우리의 국익 관점에서 전략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전장’ 개념이 일본 자위대에 통합작전사령부가 설치된 직후에 나왔다는 것도 심상치 않다. 통합작전사령부는 일본 육해공 자위대를 통합 지휘하는 상설조직으로, 지난 3월 24일에 설치되었다. 2006년에 설치된 통합막료감부와 그 지휘관인 통합막료장은, 수상과 방위상 등을 보좌하는 문민통제 라인 상의 역할과 무관으로서 최고 지휘관의 역할을 겸무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후자에 전념하는 기관과 직위를 신설한 것이다. 초대 통합작전사령관에는 나구모 겐이치로(南雲憲一郎)가 임명되었다. 그의 조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은사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郎) 만주 육군군관학교장이라는 점은 역사와 지정학의 묘한 교차점을 이루고 있다.
미국의 바이든 전 정부는 자위대 통합작전사령부 발족에 맞추어 주일미군을 재편하여 통합군사령부를 신설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 출범 후 경비가 삭감되어 중단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CNN, 2025.3.19.). 이 계획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폐기되는 것이라면, 인도태평양에서의 ‘미·일동맹 일체화’ 대신 ‘미·일의 지역분담’ 구상이 현실화하는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다.
일본이 시도하는 미·중 재균형화의 경향
그러나 미·일동맹 강화의 이면에서 전개되는 일본의 헤징 외교에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양상을 보면 이 지역에서 전개되는 질서 재편의 규모가 전례 없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양다리 외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일본의 헤징 외교는 전후 일본 외교의 특기이기도 하다. 그 긍정적인 면을 포착하기 위해 한 외교 평론가(사토 마사루, 佐藤優)는 이를 더블바인드(Double Bind) 외교라 불렀다.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양쪽을 둘 다 붙잡는다는 의미가 있으니, 이를 ‘양철(兩綴) 외교’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사실 ‘양철 외교’의 기미는 이미 기시다 내각 때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기시다 내각은 바이든 정권에 호응해서 한・미・일 3각 안보협력에 집중하면서도, 2023년 히로시마 G7을 전후해서는 가치관으로 세계가 분단돼 있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면서 일본 외교의 중심을 글로벌 사우스로 조심스럽게 이동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기시다 수상은 북한과도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아베의 대북 강압외교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비치기도 했다. 이시바 내각에 들어서서 중국과 러시아, 북한은 일본 외교의 선택지로 더욱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정전 여부에 달려 있기는 하겠지만, 이시바 내각은 정전 성립 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대화 가능성이 점쳐지는 가운데 북한과의 협상 기회를 엿보고 있다. 푸틴 대통령과도 러‧일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 재개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이시바 수상은 일본자민당 및 공명당과 중국공산당과의 정당 간 교류를 6년 만에 재개시켜, 중·일관계 개선의 큰 흐름을 만들어 냈다. 중국 왕이 외상도 이시바 수상 취임 이래 중·일관계가 개선 발전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개시한 관세 전쟁 하에서, 한・미・일 협력틀의 균형추로서 한・중・일 협력에 중・일 양국이 거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일본은 근대 이래 두 차례의 전쟁으로 지역패권 국가가 되어 해양 패권을 장악하고, 청, 러 등의 대륙 패권에 대항할 세력균형 체제를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로는 미·일동맹을 통해 세력균형 체제를 부활시키고 이 현실을 반영한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조약체제 안에서 안보 이익을 확보해 왔다. 그런데 트럼프 2.0 시대에 미·일동맹 흔들기가 개시되어 일본의 안전보장 체제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인식 하에 지역질서 재편을 위한 일본의 행보가 분주해지고 있다.
지혜로운 대일외교의 필요성과 가능성
지금 동북아 국제정치의 현장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개시한 관세 전쟁, 그 이면에서 ‘하나의 전장’ 구상으로 드러난 미・일의 지역 분담화 움직임, 이와 동시에 진행되는 한・중・일 협력 틀의 재부상, 북・미 및 북・일 수교 협상의 가능성 등, 그 어느 것 하나만으로도 지각변동을 일으킬 현안들이 즐비하다. 이것이 6월 3일, 새 대통령이 당선되어 새로 구성될 정부가 유예기간도 없이 바로 직면하게 될 엄혹한 현실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새 정부는 지난 윤석열 정부 내내 국민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대일 외교에서 지혜로운 해법을 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대일 외교는 ‘무외교의 외교’였다. 또 그것은 ‘무원칙의 외교’이기도 했다. 국익이 충돌하는 현장에서 주고받음을 통해 이익을 조정하고 실현하는 것이 외교라고 한다면, 견지해야 할 최소한의 원칙을 던져버리고 일방적으로 내어 주면서 아무 것도 받아낸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무원칙· 무외교’의 외교라는 질타를 받아야 했다.
제3자 대위변제 해법과 사도광산 등재 과정이 명백한 사례들이다. 사도광산 추도식의 파행은 ‘무원칙· 무외교’의 대일 외교가 맞이했던 파국이었다. 이를 강도 높게 질타했던 국민은 새 정부에서 ‘제자리로 돌아가는’ 대일외교를 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긴박한 상황에서 새 정부 출범을 기다릴 것만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으로 새 정부의 지혜로운 해법을 이끌어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회가 그 일을 할 수 있다.
과거사 해결을 위한 국회의 역할
강제동원 피해자 구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 마련이 그것이다. 국회는 문재인 정부 때, 문희상 국회의장을 중심으로 ‘기억・화해・미래 재단’ 법안을 마련하고 그에 따른 해결을 시도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가해 일본 기업의 책임을 명확히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를 보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피해자들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가해 기업의 책임 인정과 그에 상응하는 조치였다. 이 조치를 사죄 반성의 표현과 재발 방지 노력으로 해석한다면, ‘기억・화해・미래 재단’ 법안에 해당 기업이 이에 기여하는 것으로 기존 법안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기억・화해・미래 재단 플러스’ 해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러스’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본 니시마쓰 건설(西松建設)이 시도했던 해법을 참고하여 마련할 수 있다. 니시마쓰 건설 방식이란, 피고기업이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 뒤 일정한 재원을 마련하여 피해자 단체에 지급하고, 피고기업과 피해자 단체가 협력하여 재발방지를 위한 추도 시설 건립과 추도식의 정기적 개최 등을 실시하는 방식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과 관련해서는 2015년 외교장관 합의 가운데, 일본 정부의 출연금이 법적 책임 이행에 해당하는 것임을 확인하고, 일본 정부 출연금의 잔여분 56억 원과 일본 정부 출연금을 대체할 목적으로 여가부에 배정된 양성평등기금 103억 원을 재원으로 하여, 사실규명을 위한 자료수집과 연구, 기억 계승을 위한 교육과 전시, 추모 시설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복합시설을 건립하기 위해 국회에서 특별법을 마련하는 것이다.
대일외교로 열어가는 외교의 새 지평
이러한 노력으로 1965년 한·일 기본조약 및 청구권협정의 한계를 넘어가는 길이 열릴 수 있다. 그 가능성은 이미 2010년 일본 민주당 정부 때 발표된 ‘간 나오토(菅直人) 담화’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 국민에 강제된 것이었음을 인정한 담화다. 이 담화를 부정하려 했던 아베와 달리 한・일 과거사 문제에서 전향적인 인식을 보여 온 이시바 수상이 이를 일본 정부의 담화로 재확인한다면, 민주당 브랜드의 ‘간 나오토 담화’는 자민당의 인식으로도 자리를 잡아 한·일관계의 새로운 미래가 여기에서 움터 나올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의 기반 위에서 한・일 수교 60년의 해, 한국에서 새로 구성되는 정부와 이시바 내각이 ‘간 나오토 담화’의 인식을 담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일보 전진시키는 새로운 공동성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일본발 ‘하나의 전장’ 구상에 대한 의구심을 덜고, 미국발 관세 전쟁에 공동 대응하며, 중국의 건전한 역할을 이끌어 내어, 한국과 일본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지역질서 구축을 주도하는 동반자로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실리외교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외교 재균형화의 길은 가치외교의 미망을 접고 대일외교를 정상화하는 데서 열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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