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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ace Foundation 평화재단

분단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세계적인 작곡가

고(故) 윤이상 음악가 유족 위로 방문

조회
19
등록일
2020-06-21

"유럽이 아무리 좋아도 대한민국만 하겠습니까?"

“윤이상은 1967년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라는 누명을 쓰고 베를린에서 한국으로 강제 납치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가혹한 수형 생활을 했습니다. 이응노 화백, 천상병 시인 등 34명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최고 사형 등 유죄를 선고한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꾸준한 구명 운동이 전개되어 결국 이 사건을 조작했던 정권은 2년 만에 형 집행정지로 윤이상을 독일로 돌려보냈습니다. 윤이상은 수형생활 동안에도 '나비의 미망인', '율', '영상' 등을 작곡하여 세계인을 감동케 하였으나, 부끄럽게도 모국인 대한민국은 끝까지 선생을 박대하여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았죠. 그렇지만 윤이상은 죽는 날까지 조국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선생의 소원은 남과 북이 모여서 휴전선에서 음악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료가 ‘유럽은 정말 대우를 잘해줘서 좋다 ‘라고 말할 때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유럽이 아무리 좋아도 대한민국만 하겠습니까?’그렇게 사지에 몰리고 고문을 당했음에도 선생은 죽는 날까지 고국 땅을 밟아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번 달에는 분단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 여사를 만나 격려의 마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분들은 아침 일찍 평화재단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서울에서 통영으로 출발했고 가장 먼저 통영 시내에 위치한 윤이상 기념관을 둘러보았습니다.



윤이상 선생의 생가 옆 부지에 조성된 기념관은 선생의 음악 세계를 조명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와 선생이 생전 독일 베를린에서 거주하며 사용하던 유품들과 독일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과 괴테 메달을 비롯한 사무집기, 생전 연주하던 바이올린, 항상 품고 다녔던 소형 태극기와 사진 5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기념관에서 안내를 해주시는 분이 윤이상 선생의 일생에 대해 감동적으로 설명을 잘해주었습니다.



“이 흉상은 북한 평양 만수대공작소에서 만든 겁니다. 윤이상 선생의 평생소원이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017년에 이 기념관을 새로 개관할 때 북한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윤이상 선생은 통영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39년을 살다가 독일로 유학을 가서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서양 음악에 동양의 사상을 담아내어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윤이상 선생은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습니다.



“윤이상은 1967년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라는 누명을 쓰고 베를린에서 한국으로 강제 납치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가혹한 수형 생활을 했습니다. 이응노 화백, 천상병 시인 등 34명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최고 사형 등 유죄를 선고한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꾸준한 구명 운동이 전개되어 결국 이 사건을 조작했던 정권은 2년 만에 형 집행정지로 윤이상을 독일로 돌려보냈습니다.


윤이상은 수형생활 동안에도 '나비의 미망인', '율', '영상' 등을 작곡하여 세계인을 감동케 하였으나, 부끄럽게도 모국인 대한민국은 끝까지 선생을 박대하여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았죠.


그렇지만 윤이상은 죽는 날까지 조국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선생의 소원은 남과 북이 모여서 휴전선에서 음악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료가 ‘유럽은 정말 대우를 잘해줘서 좋다 ‘라고 말할 때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럽이 아무리 좋아도 대한민국만 하겠습니까?’


그렇게 사지에 몰리고 고문을 당했음에도 선생은 죽는 날까지 고국 땅을 밟아보고 싶어 했습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23년이 지난 2018년에서야 베를린에 있는 유해를 통영으로 모셔왔습니다. 설명을 듣고 스님은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분단의 비극이에요.”



김명혁 목사님도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며 한마디 했습니다.


“저는 사실 오늘 아침까지 윤이상 선생에 대해 몰랐습니다. 오늘 설명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까지, 민족을 사랑하신 정말 귀한 분이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여기를 방문하고 가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걱정이 싹 사라졌습니다.” (웃음)



윤이상 선생은 일평생 남과 북이 하나가 되기를 소원했다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종교인분들은 북한에서 제작했다는 선생의 흉상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윤이상 선생의 부인인 이수자 여사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여사님은 올해 나이가 94세입니다. 현관을 열자 여사님이 환한 웃음으로 종교인분들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연세보다 훨씬 정정해 보이셨습니다.



가장 먼저 김명혁 목사님이 이수자 여사님을 위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죄와 허물 밖에 없는 우리들이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20여 년 이상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마음과 뜻을 모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뿐만 아니라 민족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살다 간, 내 몸이 고국에 가서 묻혀야 한다고 마지막 소원을 말하며 돌아가신, 우리 민족과 세계를 품으며 살다 간, 윤이상 선생님을 기억하며 우리 종교인들도 그 정신을 배우겠습니다. 이수자 여사님도 남편을 떠나보냈지만 남은 여생을 건강하게 살다 가시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종교인분들은 여사님을 위로하며 가볍게 담소를 나눈 후 준비한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종교인 모임에서는 성금을 모아 전달하고, 스님은 작년에 북한 방문을 했을 때 받은 한반도를 수놓은 액자를 선물했습니다.



여사님과 기념사진을 찍은 후 집을 나왔습니다.



다음은 윤이상 선생의 유골이 묻힌 묘지를 참배했습니다. 묘지는 통영 국제음악당 한편에 소박하게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음악당의 이름이 이상해서 스님이 물었습니다.



“왜 윤이상 음악당이 아니고 통영 국제음악당이죠?”


“아직 반대 여론이 많아서 윤이상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수 단체에서 반대 집회를 여러 차례 했다고 합니다. 분단의 장벽은 지금도 남아 있었습니다. 묘지는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아늑한 위치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잠시 참배를 한 후 음악당을 둘러보았습니다.





여사님은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윤이상 선생님이 다시 생각나는지 바다를 보며 상념에 잠겼습니다.



“음악당에 묘지를 마련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묘지 안에서도 늘 음악을 듣고 있으니까요.”


다시 웃음을 보이는 이수자 여사님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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