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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84차 발표요약] 아프가니스탄 정세를 말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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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날짜 | 2021-10-21 | 조회 | 210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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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차 전문가 포럼
아프가니스탄 정세를 말하다 사회 (남기정 교수, 서울대 일본연구소): 한국의 국격이 상승하여 이제 세계 정치를 무대로 외교를 구상하고 있지만 여전히 외교나 연구 분야에서는 미중일러 4강 외교에 갇혀서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동네 축구처럼 공만 쫓아다니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오늘 주제는 ‘아프가니스탄 정세를 말하다’이지만 ‘세계의 정세를 말하다’로 읽어도 될 것 같다. 세계 정치에서 골대로 이어지는 핵심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이러한 문제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서 너무나 이해가 얕고 잘 모르는 게 현실이다. 세계 정치를 이해하는 핵심 주제로서의 아프가니스탄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 공간적으로는 세계 정치를, 역사적으로는 19세기 중후반 이후의 세계정세를 아우르는 시공간적 범위를 다룰 것으로 예상된다.
1부. 발제 – 아프가니스탄 정세를 말하다(이웅현 고려대 융합연구원 교수)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해 말할 때 보통 탈레반 문제라고들 하지만, 경험상 탈레반만의 문제는 아니다. 좀 더 폭넓은 시야에서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평상시에는 일반인은 물론 연구자조차도 어떤 사건이 없으면 지속적인 관심을 갖기 어려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 나라이다. 그런데 사실 최근 40여 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약 10년 주기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사건들이 발생해 왔다. 현대에 들어와 가장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던 사건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다. 당시는 냉전 시대였기 때문에 한국은 소련에 대한 정보도 부족할 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는 상태여서 사건을 실감하기 어려웠으나, 실제로는 그것이 세계 정치사의 지형을 바꾸는 커다란 사건이었다는 사실이 최근 미군 철수 과정에서 드러났다. 1979년 12월 크리스마스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뒤 10년 동안 전쟁을 한 소련은 1989년 2월 최종적으로 철수하고, 이 과정에서 또 한 번 아프가니스탄은 ‘냉전 시대의 초강대국을 패배시킨 그로테스크한 나라’라는 인상을 남기며 전 세계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 후 12년 만인 2001년, 당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비호를 받던 알카에다가 주도한 911 테러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미국의 관심이 다시 집중되었다. 미국은 그해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1년 오사마 빈 라덴이 이웃국가인 파키스탄에서 사살되었다. 그리고 다시 10년 뒤인 2021년 현재,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거의 10년 주기로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장장 42년에 걸쳐 이어진 전쟁이 결국 아프가니스탄에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오늘날처럼 복합적인 세계화의 시대에는 보통 한 국가의 정치적 운명이 주변 정세의 변화를 불러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19~20세기에 걸쳐서는 영국, 1979년 이후에는 소련(소련은 아프가니스탄 10년 전쟁 이후 결국 해체된다), 그리고 현재는 세계 경찰국가의 역할을 하고 있던 미국에 이르기까지, 아프가니스탄처럼 강대국의 운명과 세계정세의 지형을 좌우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드물다. 1871년 비스마르크 주도 하에 프러시아와 약 300여 개의 열강들이 하나로 통합돼서 독일을 통일하고 제2제국을 건설했을 때 주변 국가들은 독일의 계속된 팽창을 우려했고, 독일은 주변 국가들의 포위 공격을 두려워했다.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1871년의 통일 독일이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주도 국가로 나설 때까지의 이 시기에 유럽 국가들이 안고 있었던 문제를 ‘독일 문제(Germen problem)’라고 불렀다. 독일과 같은 강대국은 아니지만 아프가니스탄이 앞으로 세계정세와 강대국들 사이의 관계를 수동적으로나마 좌우할 수 있는 요소가 될 것이라고 보고, 앞으로 전개될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국제 정세를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부르고자 한다. 우선 아프가니스탄의 현재의 정세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 이곳이 지리적으로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지정학적 위치와 복잡한 지형적 특성
아프가니스탄은 남서쪽으로는 척박한 사막 지역이고, 북쪽은 약 2/3가 해발고도 3,000~ 6,000m의 험준한 산악 지역이다. 힌두쿠시 산맥이라 불리는 이 지형은 전통적으로 수도 카불의 중앙 권력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게 만들어 지방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는 미군 점령기간에도 마찬가지여서 산악으로 숨어드는, 탈레반 게릴라 또는 지하드의 전사들로 불리는 반정부군을 소탕하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과거 소련도 산악 지역에 헬기를 동원해서 반정부 게릴라 소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왜 아프가니스탄을 ‘제국의 무덤’이라고 하는지 지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남쪽 사막 지역에는 헬만드(Helmand), 칸다하르(Kandahar), 님로즈(Nimroz)라고 하는 세 커다란 주가 있다. 그 오른쪽으로는 파크티카(Paktika) 위에 있는 호스트(khost)라고 하는 지역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이 지역은 ‘하카니 네트워크(Haqqani network)’가 웅거해 있던 곳이다. 그리고 위쪽으로 힌두쿠시 산맥 바로 아래, 최근 탈레반에 저항하는 마수드를 비롯한 과거 정부군의 은거지로 보도된 판지쉬리(Panjsher)는 탈레반의 주축인 파슈툰 족이 아닌 타지크, 하자라 등의 부족이 주도하고 있는 험준한 산악 지역이다. 힌두쿠시 산맥이 관통하고 있는 이 지역은 사실 과거에 소련이 10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판지쉬리의 사자’라고 불렸던 마수드 세력을 결국 소탕하지 못하고 7차례에 걸쳐서 협상을 해야 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카불을 중심으로 한 소련 주둔군에게는 이곳이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에서 넘어오는 보급로였다.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 : 지형적 차이점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은 2006년 대부분 이라크에서 철수했다. 이라크에서는 그렇게 쉽게 해결했던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왜 고생을 했을까? 아프가니스탄(좌)과 이라크(우)의 지도를 비교해 보자. 이라크가 위치한 ‘비옥한 초승달’로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평원은 생산력도 뛰어나지만 군사작전을 감행하기에도 그렇게 어려운 곳이 아니다. 반면 낙엽처럼 생긴 아프가니스탄 영토는 대부분이 산악지역이라, 군사적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지역이다. 이렇듯, 아프가니스탄의 이러한 복잡한 지형과 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정세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프가니스탄의 인종/종족 구성
이 복잡한 산악 지역에는 다양한 인종과 부족이 존재한다. 동쪽과 남쪽에 걸쳐서 분포하는 종족(갈색)이 파슈툰 족이다. 탈레반은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한다. 아프가니스탄 전체 인구가 대략 3,800만~4천만 명 정도이고(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음) 그 가운데 파슈툰 족은 42%(약 1,500만명)로 가장 많다. 두 번째로 많은 종족은 타지크 족이다(녹색, 27%). 탈레반과, 카불의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그리고 그 이전의 하미드 카르자이(초대 대통령) 모두 파슈툰 족이지만, 정부 구성은 일종의 연립 정부처럼 타지크인과 우즈베크인 등 소수파 인종들로도 구성되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탈레반 파슈툰 족의 입장에선 조금 거리가 느껴지는 그런 정부 구성이었다. 여기서 또 하나 특이할 만한 사실은 파슈툰 족이 거주하고 있는 동남부 지역의 오른쪽이 파키스탄인데, 이 파키스탄에도 파슈툰 족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내 파슈툰 족이 1,500만 명인데 파키스탄 쪽에는 약 3천만 명이 살고 있다. 파키스탄 인구가 워낙 많기 때문에(2억 2천만 명) 파슈툰 족은 파키스탄 내에서는 소수 인종이지만, 아프가니스탄에 비해서는 다수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파슈투니스탄(파슈툰 족의 국가)’을 건국하고 싶어하는 상황이다. 또 타지크인들도 타지키스탄에 타지크인들이 살고 있고, 우즈베크인(빨간색)도 우즈베키스탄이 존재해서 적잖이 개입받기 쉬운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 외에 하자라인(노란색)들은 몽골 계통이라 한국인과 비슷한 얼굴형이다. 인접 지역에 동일한 인종이 살고 있고 아프간 내부에는 다양한 인종이 분포되어 있는, 이러한 독특한 인종 구성에 대해 미국의 한 학자는 모자이크 국가라고 규정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지형적인 요소에 더해서 이러한 인종 구성 역시 카불 중앙 권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요건이다. 종족 간 대립 갈등의 소지가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대립의 소지는 물론 파슈툰 대 비(非)파슈툰이다. 정치 세력으로서의 파슈툰의 위치
전통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 구성 변화와 관계없이 언제나 지도부는 42%를 차지하는 파슈툰 족이 차지해 왔다. 크게 ‘두라니 파슈툰’과 ‘길자이 파슈툰’이 있고 또 세부적으로 여러 종족이 있는데, 두라니 파슈툰의 아흐마드라는 사람이 왕국을 건설했고 그 이후로 두라니 파슈툰 족이 계속 집권을 한 것이다. 마지막 왕이었던 자히르 샤(사진 왼쪽 첫 번째)가 이탈리아에 체류 중이던 1973년에 당시 총리였던 왕의 사촌동생 모함메드 다우드(사진 왼쪽 두 번째)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공화국을 선포한다. 쿠데타였지만 나름대로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싶어 해서,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독립적인 길을 걸으려고 했던 사람이다. 1978년~1992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집권세력은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라고 하는 이른바 공산주의 세력이었다. 이들도 역시 쿠데타(4월 혁명)로 정권을 잡았는데 이 집권 기간 내의 4명이 모두 파슈툰 족이다(사진 왼쪽 세 번째부터 순서대로 타라키, 아민, 카르말, 나지불라). 나지불라는 길자이 파슈툰이긴 했으나 공산주의 세력이 집권하든, 공화주의 세력이 집권하든 파슈툰 족인 것은 변함없었던 것이다. 1989년 소련 철군 뒤 3년 동안 그럭저럭 정권을 유지하다가 1992년에 결국 나지불라가 탈레반에 체포, 처형된다. 이 탈레반이 집권하기까지의 과정에 내전 기간이 있었는데(1992년~1996년) 이 시기에도 과거 소련군에 저항하던 7개의 대표적인 반군 집단(Seven Stars)이 인접 국가인 파키스탄 군 정보부의 지원(미국에서 오는 자금을 중간에 전달한 통로 역할)을 받고 있었다. 이 7개 세력 중 가장 큰 세력이 헤크마티야르 파와 랍바니 파였는데 1992년~1996년 내전 시기에 서로 반목하는 가운데 둘은 교대로 대통령, 총리를 역임한다. 둘 다 파슈툰이다. 당시는 탈레반이 결성되던 초기였다.
1996~2001년 제1기 탈레반 정권의 지도자 물라 오마르(사진 왼쪽 첫 번째) 역시 칸다하르 출신의 (길자이) 파슈툰이다. 그리고 미국의 침공으로 탈레반이 축출된 이후인 2001년부터 과도정부의 수반을 맡은 하미드 카르자이(사진 왼쪽 두 번째)도 두라니 파슈툰이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아슈라프 가니다. 하미드 카르자이와 아슈라프 가니는 미국에서 성장한 인물들이다. 하미드 카르자이는 유노칼 석유회사의 고문이었고 아슈라프 가니는 경제학자로서 세계은행 등지에서 활동했는데 역시 파슈툰이다. 결국 아프가니스탄에서 정치 지도부의 세력 판도에 관한 한 파슈툰을 제외하고는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다. 2021년 현재 미군 철수 이후가 제2기 탈레반 정부인데 여기에 막후의 신비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지도자가 아훈드자다(사진 왼쪽 네 번째)이다. 이 사람이 이른바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로 내세운 사람이 아훈드(사진 맨 오른쪽)이다. 그리고 바라다르(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사실상 탈레반의 실권자인데 현 아프가니스탄 임시 내각의 2인자로 꼽히는 인물로, 모두 파슈툰이다. 특히 바라다르는 하미드 카르자이와 같은 두라니 파슈툰으로, 산 속에서 탈레반이 게릴라 활동을 지속했지만 실제로는 2001년 하미드 카르자이 내각이 지속될 때 지속적으로 협상 가능성에 대해서 모색하고 대화를 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주변적인 여건이 맞지 않아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최근에 와서야 성공하게 된 셈이다. 이것으로 인종적 구성 그리고 정치 세력 내에서의 파슈툰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왕국 건설 이후로 2021년 현재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에미리트(수장국)를 선포한 지금까지 줄곧 파슈툰이 지도부를 지배해 왔다. 소련이나 미국은 줄곧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연립 정부 또는 포괄 정부를 구성하라고 재촉하거나 충고했으나 그것은 사실상 쉽지 않은 것이다. 연립 정부가 구성되면 다수인 파슈툰으로부터 배척당하기 쉽고 또 지방의 권력이 중앙의 권력을 따르지 않는 정치적,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과의 관계
아프가니스탄의 현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하나 확인해 두어야 할 것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이다. 과거 국경이 불분명했던 시절,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시아를 침탈하던 시기, 러시아와 파키스탄을 사이에 두고 인도를 장악한 영국이 완충지대 건설을 위해 일종의 경계선을 그었고 그것을 ‘듀란드 라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에는 파슈투니스탄(지도 빗금 표시된 부분)이라는,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파슈툰족이 거주하는 험준한 고산지대가 있다. 그래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실제 국경은 듀란드 라인이지만 사실 명확한 국경선이 없는 셈이다. 아프가니스탄이 외국군의 침공을 받을 경우 도주세력들은 대부분 파슈투니스탄 지역으로 갈 수 있고, 파키스탄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들을 적대하기 어렵다. 가끔 미국이 파키스탄 정부를 종용해서 이 지역의 게릴라를 소탕하라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시늉만 하는 일이 되풀이되곤 한다. 정리해 보면 아프가니스탄은 산악지형, 불모지,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립적이고 중앙권력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합체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국 개입의 소지가 다소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통계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인구 통계는 중앙 정부가 주도해서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 조사를 위해 산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정확한 인구 통계가 부족하고 문맹률도 높은 상태이다.
비극의 40년 전쟁사 아프가니스탄은 역사적으로 영국, 소련, 미국 등 당대 최강대국들의 침공을 받았으며, 그것을 모두 물리친 나라로 알려져 있다(특히 미국은 20년 동안 전쟁을 하면서 현대의 전쟁 가운데 가장 긴 전쟁을 치른 나라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와도 나갈 때는 마음대로 못 나간다’는 자부심과 자존감이 충만하다. 그러나 1979년 이후로 전쟁-내전-전쟁 상태가 40여 년 동안 반복되며 사망자와 난민이 끊이지 않았던 비극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소련과의 전쟁 중에만 해도 100만 명의 사망자와 6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현재 미국의 철수로 지금 그 비극은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왜 탈레반 세력과 같은 보수적이고 전근대적인 세력이 정권을 잡을 수밖에 없었을까? 물라 오마르가 1996년 조직한 탈레반은 처음에는 약 30명 정도의 집단이었다고 한다. 오마르의 제1기 탈레반 정부가 수립되고 1992~1996년까지 4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전에 대한 혐오감과 질서를 갈망하는 국민정서 때문이었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가 국가설립의 궁극적 목적을 ‘인간의 안전과 질서 보장’이라고 말했듯, 그것이 아무리 공포스러운 세력이라고 하더라도 그 하나를 두려워하는 것이 내전 상태에서의 각 지역 군벌, 민병대등의 여러 세력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다. 이후에도 탈레반은 외국의 침공으로 점령당한 상태에서 가장 강력한 반정부세력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흔히 탈레반을 무법 집단 내지는 쿠데타 세력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현실적으로는 정치 세력의 판도를 보면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 집단이자 정치 집단인 것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알카에다/탈레반 축출’에서 ‘국가건설’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당시 초기 목적은 알카에다와 탈레반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001년 10월 7일 공습을 시작한 후 11월 초에 이미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거의 도주하거나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축출된 것으로 판단되어, 전쟁의 목적이 예상보다 쉽게 달성되었다. 때문에 목적 달성 후 출구 전략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철군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전쟁의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에 하나의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전쟁 목적이 바뀐 배경에는 테러조직을 비호하는 세력이 재집권할 가능성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주둔을 연장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고용된 용병 문제, 무기보급 등 이해관계자들이 늘어난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는 이른바 군산복합체론도 있지만 전쟁 초기에 그런 이론을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침공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도널드 럼스펠드가 남긴 정책 문서들을 보면 언제 빠져나와야 될지를 2001년 말에 고민하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뚜렷한 출구 전략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어쩌다 보니 계속 눌러앉아 있게 됐다는 그런 설도 일견 타당성은 있다. 전통사회와의 전쟁(네포티즘, 사회기반시설 부족)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지형의 특성을 안다면 근대국가건설이라는 목표가 단 기간 내에 수립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겠지만, 이 모자이크 국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미국이 싸워야 할 대상은 사실 탈레반 세력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사회 구조의 재편이었다. 네포티즘(nepotism, 권력자가 자기 친족에게 관직 등을 주는 일)은 서구의 정치 윤리 기준으로는 전근대적이고 부패한 관례이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당시에 그런 의식이 없었다. 즉 그 사회의 특성에 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난제는 산악지대와 사막으로 이루어진 이 국가의 사회기반시설이었다. 기본적인 도로나 통신망들을 건설해야 근대국가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데 이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지역에 도로를 건설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보니 산악 지역에서 은거하는 반군 세력들이 통행세를 받음으로써 테러활동의 재정을 충당하곤 했다. (미국 이전에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근대적인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다. 침공 이전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지원하면서 칸다하르와 카불, 그리고 북쪽으로 마자르이샤리프와 서부의 헤라트라는 주요 4개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했다.)
미국은 근대국가 건설의 중요한 요인인 아프가니스탄 산업 구조의 재편에도 실패했다. 양귀비 재배를 근절하지 못한 것이다. 양귀비는 아프가니스탄의 주력 산업이며, 탈레반 수입의 주요 근거이기도 하다. 비료 없이도 척박한 토양에서 잘 자라며, 1년에 세 차례 이상 속성 재배가 가능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전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헤로인, 아편의 90%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된다는 말도 있다. 제1기 탈레반 정부는 아프간에서 양귀비 재배를 근절하고 대신 밀을 재배하도록 했으나 실패한 바 있다(밀은 1년에 한 차례밖에 수확할 수 없을뿐더러 손도 더 많이 든다). 미국 역시 그것을 근절하는 데 결국 실패한 것이다. 모자이크 국가에 대한 몰이해 나토연합군이 점차 발을 빼기 시작하면서 미국이 주로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철군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안보를 위해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경찰을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이 또한 실패했다. 군이라면 적어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일단 종족구성이 너무나 다양한데다, 파슈툰의 탈레반 세력이 2005년 전후로 이미 아프가니스탄 34개 주 중 33개 주에 주민들의 문제 해결을 해 주는 섀도우 캐비닛(Shadow Cabinet, 어둠의 정부)을 두고 있었다. 때문에 파슈툰 입장에서는 미국이 양성하는 정부군에 월급을 받기 위해 참여는 하지만 실제로 미군과 탈레반이 교전 상태에 빠졌을 때는 보조 역할 내지는 방관을 하는 상황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을 두고 무기력한 집단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징집해서 양성하려고 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21년에 미국이 철수하면서 탈레반이 급작스럽게 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탈레반은 항상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해 왔던 것이다. 2021년 8월 초 미군 철수가 본격적으로 실시되고 탈레반이 각 주 정부를 하나씩 장악하기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이 꽤 오래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불과 열흘 남짓한 기간 에 카불까지 완전히 점령을 해버렸다. 도하 평화협상의 한계와 미군 철수 과정에서의 혼란 앞서 2020년 2월 29일 카타르 도하에서 탈레반의 바라다르와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미군 철수와 이후 아프간 정세 관리 문제로 협상을 벌여 합의했다. 이 협상에 원래는 카불의 아프가니스탄 정부 측도 참석했어야 했지만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미군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정부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에 협상 과정에 가담하지 않았다. 한 축이 취약한 상태로 협상을 거부하다 보니 결국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의 20년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일종의 강화 회담의 성격을 지닌 이 합의가 전면강화가 아닌 편면강화가 돼 버렸다. 사실 탈레반은 기본적으로 카불까지 진격하지 않고 협상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카불의 정부가 도주한 것에 전 세계인들이 놀랐지만 가장 놀란 것은 탈레반이었다. 탈레반조차도 그렇게까지 급작스럽게 아프가니스탄이 붕괴될 것을 예상하지도, 계획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즉 이 강화회담에서 한 축이 협상을 거부하고, 그 한 축이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철수 과정에서 여러 가지 혼란이 생긴 것이다. 도하에서 2020년 2월에 이루어진 합의에 따르면 탈레반은 미국과 합의한 이후에 아프가니스탄 내 국내 정파들 간 협의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무산되다 보니 결국 카불이 갑자기 혼란에 빠져버리고, 미군 철수도 여러 가지로 방해를 받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미국은 패주했다기보다는 평화 협상에서 카불 정부를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카불 정부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탈레반과의 협상을 계속한 것일 테지만, 기본적으로는 20년 동안 미국이 카불에 건실한 정부를 세운다는 목표에 실패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탈레반 정부의 변화에 대한 전망 탈레반이 과거에 비해 달라졌을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데, 도하 합의문에 의하면 탈레반은 앞으로도 미국과 계속 협상을 해야 한다. 경제 원조를 위해서나 아프가니스탄 내의 미국 동맹국들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테러세력을 비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도 협조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국가 간 협약이란 이해관계가 바뀌면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아직까진 탈레반 임시 내각은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고, 미국도 철군은 했지만 합의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탈레반이 달라졌을지 여부에 대해서는 탈레반의 새로운 내각 구성을 보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탈레반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예상은 탈레반의 임시 내각이 구성되기 전에는 사실 추측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20년 전 제1기 탈레반 정부 당시 미국에 국가 승인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하여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던 기억, 그리고 ‘테러 집단을 비호했기 때문에 미국의 침공을 받았다’는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고 따라서 일종의 학습 효과에 의해서 이전의 정책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은 할 수 있었는데 임시 내각 발표를 보면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20년의 치열한 전쟁은 여러 가지를 바꿔놓았지만 탈레반도 그 변화 중 하나인 것이다.
탈레반 안에도 여러 정파가 있다. 그 중 하카니 네트워크에는 잘랄루딘 하카니와 그 동생 할릴 하카니(오른쪽 위 사진), 잘랄루딘 하카니의 아들 시라주딘 하카니(오른쪽 아래 사진)가 있었는데 새로운 내각이 구성될 당시 잘랄루딘 하카니는 이미 사망했고 할릴 하카니는 카불을 장악했을 당시 카불 치안국장을 하다가 새로운 내각에서는 난민정책 담당 장관이 되었다. 시라주딘 하카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카니 네트워크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들은 탈레반 내 가장 강력한 무력 집단이자 강경파로 평가받고 있다. 바라다르와 스타넥자이(사진 왼쪽부터 첫 번째, 두 번째)는 20년 전부터 미국과 협상을 했던 온건파, 주화파 세력이다. 바라다르가 2010년 파키스탄에 의해 체포되자 미국은 협상을 위해 2018년 파키스탄에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바라다르는 카타르 도하에서의 협상 끝에 결국 미군 철수를 이끌어냈다. 스타넥자이는 이미 제1기 오마르 정부 시절부터 미국과의 협상 창구로 활용되었던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세대교체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은 새 내각의 국방장관 야쿠브인데 1990년생으로 물라 오마르의 아들이다. 탈레반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서방 세계를 비롯한 여타 국가들과 교류를 계속하면서 변화해 나갈 것으로 판단된다. 여성 인권과 교육 문제는 물론 단기간에 바뀌기는 어렵겠지만, 그러나 변화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2부 – 질의응답 Q.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의 중앙집권 가능성: 탈레반이 학습 효과를 얻어서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외교적 측면만이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제대로 된 민주 국가를 건설할 가능성이 있을까? A. 탈레반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은 현재까지는 판지쉬리 지역으로 도주한 북부동맹의 잔여 세력이다. 탈레반은 지금 이 지역을 완전히 진압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결과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 지역은 과거에 탈레반과 미국이 전쟁을 벌인 시절에도 탈레반의 영향력이 행사되지 않는 마지막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제1기 오마르 정부도 이 지역은 장악하지 못하여 북부동맹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탈레반의 세력이 더 확장되어 있는 상황이다. Q. 가니 정부가 도하 협상을 거부한 것과 이승만이 휴전 협상을 거부한 것을 상황이나 동기 측면에서 비교한다면? A. 한국전쟁 과정에서의 이승만 정부의 입장을 세밀하게 추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으나, 이승만 정부는 휴전 협상을 거부한 것이었고 당시 전쟁 이전에도 이승만 정부는 장제스의 스타일을 모방해 북진 통일을 주장했었기에 명분상으로는 이승만 정부는 휴전 협상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명분상 유엔군이지만 미군의 지원을 받는 상황에서,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이른바 오히려 협상력 강화를 위해서 휴전 회담을 거부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여겨진다.
Q. 한국의 외교 전략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비중과 의미: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빠져나온 것은 동아시아에 좀 더 집중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전 세계적인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봐야 되는가? A. 미국의 아프간 정책은 따로 떼어놓고 보아야 한다. 보통 자신의 동맹국이 좀 취약해 보이면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 나토 내에서의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에서도 미국의 유럽 보호 전략이나 핵우산이라는 것을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그런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처럼 당연한 고민이기는 한데, 사실상 세계 경찰국가로 활동하던 국가가 어느 한 지역에서 20년 동안이나 전쟁을 수행하면서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자국의 군사력을 철수시켰을 때 쇠퇴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철수시킨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한국 등 동아시아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으리라고 본다. Q. 강의를 들으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지정학적 위치는 유라시아 대륙의 대립의 정중앙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굉장히 지정학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역임에 분명한데 아까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한반도 문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것 같지는 않다고 하셨다. 근데 그 의미가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세계 정치에서의 중요도가 낮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한반도 문제가 아프가니스탄 문제와 동시에 중앙 무대에서 약간 비껴나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가 전혀 상관없는 걸로 봐도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A.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상 위치를 중동이라고 해야 될지, 중앙아시아라고 해야 될지 아니면 서남아시아라고 해야 할지 명확하지 않다. 때로는 중동 지역 연구자들의 관심 대상이기도 하고 때로는 파키스탄 같은 서남아시아 국가들, 또 때로는 중앙아시아의 테러리즘 연구자들의 관심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는 이 아프가니스탄을 그 어느 지역에도 속하지 않는 과거 실크로드의 가교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파키스탄이 과거에 이란과의 교역을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해야 했는데 아프가니스탄이 내전 상태였기 때문에 내전을 종식시키고 질서를 잡을 수 있는 세력으로 탈레반을 양성해서 투입했다는 설도 있을 만큼,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도 동서의 가교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그래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아프가니스탄을 ‘하이웨이 국가’라고 불렀다. 전략상, 교역상의 요충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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